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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네 Nov 08. 2023

7일의 107km 올레길 걷기를 마치며

[올레 6] 15 & 16코스 바다와 꽃

역시 사람은 바로 바뀌진 않는다.

사람의 온기를 핑계로 급히 잡은 게하에서 따뜻함을 넘어 뜨거운 불멍에 이틀 연속 푹 빠져버렸다. 심지어 불씨가 꺼진 뒤에는 낮에 투명카약을 탈까 고민했던 한담 해변까지 다 같이 걸어가 바닷물에도 빠져버렸다. 그리고 이들과 새벽 4시까지 얘기하며 사람냄새가 나지 못해 몸속까지 베어버리는, 잊지 못할 제주도 마지막 밤을 보냈다.



하루종일 걷고도 새벽까지 이토록 사람에 푹 빠진 이유는 아마도 오늘 낮에 남녀노소 모두의 사랑을 받는 올레 15-B 코스를 걸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15코스는 내륙길인 A코스와 해안길인 B코스가 있는데 진정한 올레꾼이 아닌 이상 99% B코스를 먼저 걷는다고 한다.)

바다는 정말 실컷 본 듯!
낮에 카약 안 하기 잘했다. 밤에 아예 수영을 했으니 ^^;

신축 카페들이 즐비한 ‘한담 해안산책로’를 따라 곽지, 애월 해안길을 걷는 5시간 동안 지난 6일 동안 본 사람들을 합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던데 나는 고작 3일 제주도 산속 좀 걸었다고 ‘안으로 들어가면 개미 우산도 보고, 지미봉에서 잊지 못할 힘듦도 겪어볼 수 있는데…’ 하며 구석구석 숨겨진 올레를 향한 애정만 깊어졌다. 흘러내리는 땀에 나도 트렌드를 따라 예쁜 카페 하나 들려볼까 했지만 시답잖은 올레 허세를 부리며 해안 뷰 정자에서 땀을 식혔다.


하지만 사람은 바로 바뀌진 않는다. ^^

두 시간쯤 걸었을까, 남들 따라 애월빵공장에서 현무암빵부터 한라빵, 메밀 소금빵까지 최대치로 먹고, 프랜차이즈 카페에도 들어가 한국인의 루틴 아아로 마무리했다. 13km의 종점 ‘고내포구’에 도착하니 벌써 저녁 6시였다. 해가 저물어서 그런가, 거리가 좀 짧아서 그런가, 빵을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가, 완주 스탬프를 찍는데 그동안 올레코스를 완주했을 때의 기분과는 사뭇 달랐다. 2% 부족했다. 마음의 허기를 채우기 위해 근처 동네 책방에 들렀다. 입구부터 책 반, 사장님이 직접 필사하신 종이쪽지들 반이었다. 덕분에 여기서도 내 눈은 길을 잃었다. 그때 마치 나를 위해 유독 잉크가 빛나는 필사 쪽지 하나를 발견했다.


“… 누군가 동행 없이 혼자 걷는다고 해서 외톨이의 길을 좋아한다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된다.”

류시화 시인의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


요 며칠 혼자 걷다가 오늘은 무리 속에 다 같이 걸으니 외로이 걷던 올레길이 그리워졌었다.

‘나는 외톨이인 게 좋은 건가. 나 설마 히키코모리?‘

라는 질문을 하며 잠깐 혼란스러운 적이 있었다. 다행히 이 필사가 아니다는 답을 주었다.

‘그동안 나는 혼자 걸은 것이 아닌, 가슴 안에 아직 피지 않은 꽃들과 동행했었기에 외롭지 않고 행복했던 거구나!’

외톨이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와, 내 마음속 꽃들과 대화할 시간의 문제였다.


마감 5분 전, 2% 부족했던 기분을 200% 초과시켜 준 책방에 고마움을 전하고 싶어 서둘러 시집 구매 후 생애 첫 필사와 첫 방명록을 남겼다. (정말 아직도 안 해본 게 너무 많네) 그리고 나는 너무 감성적이 된 나머지 지갑을 놓고 왔고, 다음 날 덕분에 또 책방을 들러 사장님의 필사 구경으로 기분 좋게 마음속 꽃들을 만나러 갔다. ^^

마감 5분 전이지만 할건 해야지. 인생 첫 필사, 첫 방문록



다음 날, 벌써 (첫 번째) 제주도 올레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정말 마지막날까지 내가 올레를 걷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오전 10시, 다시 자유로운 외로움을 즐기기 위해 바다 & 내륙길 16코스를 걷고 있었다.


약 16km의 16코스는 고내포구에서 해변을 걷기 시작해 광령리 내륙으로 들어가는 5시간 정도의 코스다. 어제는 바다 구경을 실컷 했다면 오늘은 제주 동네 구경을 실컷 했다. 옛날 소금을 끓여내던 돌염전 ‘구엄리 빌레’를 지나 동네 산책로인 ‘수산봉 오름’을 올라가니 중간 지점 ‘항파두리 코스모스 정자’에 도착했다. 한 그루의 소나무 감독 하에 넓게 펼쳐진 코스모스 밭도 장관이었지만 그 위로 날아다니는 수많은 나비들이 화룡점정이었다. 그중 나비 세 마리가 동그란 원을 그리며 20초가량 꽃이 아닌 하늘 높이 날아올랐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저 나비들은 왜 꽃을 두고 하늘로 날아가는 걸까?’

나비의 행복은 꽃이라고 생각했지만 꼭 모든 나비에게 그런 것은 아니었나 보다. 어떤 나비에게는 모든 꽃이 행복의 전부이고, 어떤 나비에게는 빨아보지 못했던 새로운 향의 꿀을 찾아 탐험하는 날갯짓이 행복이고, 또 어떤 나비는 더 높이 날아가 보는 게 그날의 행복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행복과 참 비슷하다.

‘우리’의 행복은 돈이나 안정된 직장, 건강, 여행 등 일괄적인 것이 아니라 ‘나’와 ‘너’의 행복은 사람마다 그리고 각자가 처한 상황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이 당연한 사실을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무시하고 그저 남들처럼 행복해지려고 발버둥 쳤으면, 그 넓은 코스모스 밭에서 나비 세 마리가 딱 그 시간에 내 앞에서 춤을 춘 걸까? 나에게도, 남에게도 어쭙잖은 행복을 강요하지  말아야겠다.

나비는 생각보다 너무 빨랐다. 나비 대신 꿀벌 찾기



걷기를 시작하기 전에는 사실 행복에 대해 이렇게까지 고민해 본 적이 없다. 이렇게 하루에 몇 시간, 며칠을 오롯이 나에 대해 생각할 생각조차도 감히 해보지 않았다. 매일 확인하는 회사의 받은 편지함보다, 정기적으로 깎아주는 내 손톱보다, 정작 제일 많이 봐줘야 할 것은 나라는 사실을 이제라도 ‘몸소’ 깨달아서 정말 다행이다.


남들 다가는 여름휴가도 현실에 찌들어 늦게 가는 바람에 어쩌다 시작된 첫 나 홀로 제주도 여행. 그마저도 일을 핑계로 계획 세울 시간 없이 올레 하나만 걷자고 했다가 시작된 걷기 여행. 이제 나는 걷기 없이 못 살게 되었다. 적어도 나에게로 걸어가는 여행이 끝나기 전까지는. (평생이라는 건가? ^^;)


7일 간 106.9km를 완주하고 제주 공항으로 가는 길, 오늘도 햇살이 눈부셨다. 내 꽃들에도 드디어 햇살이 들어오는 듯했다. 올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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