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를 잊지 못 해
장미는 우리반이었던 초3 여학생 이름이다.
지각한 번 없이 항상 일정한 시간에 학교에 와, 1교시부터 6교시까지 무표정으로 수업을 듣는 장미.
심지어 화가 나도 표정이 크게 변하지 않는다.
가끔 너무 웃기면 장미도 웃는다. 그러다가 "어! 장미야 재밌어?" 하고 일부러 아는척을 했더니 마치 몰래 웃다가 들킨 아이처럼 "-_-넹" 하고 부끄러워한다.
그런 장미는 발표를 어지간히 하지 않았다.
발표라는 것이 늘 논리적인 문장으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높은 수준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계절을 좋아하는지, 그 이유랑 같이 이야기 해 볼 사람?"
서로 대답하겠다고 손을 든다.
언제나 장미는 손을 들지 않는다.
일부러 장미를 부르면서 "장미는 어떤 계절이 좋은지 한 번 이야기 해 줘." 하면, 웃고있다가도
-_-; 이 표정으로 변한다. '나를 좀 난감하게 만들지 마시오 교사양반' 이런 느낌이랄까?
그 표정이 사실 엄청 귀여워서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아무튼 아무리 쉬운 질문을 해도 발표를 하지 않는 아이 장미.
부끄러움이 많은 아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의 전환을 일으키게 한 일이 몇가지 있는데...
1. "어떤 계절이 좋아?"라는 질문에는 답변하지 않았던 장미는 쉬는시간에 나에게 오더니
"근데요 저는요 딱히 좋아하는 계절이 없는데요?" 하는 것이었다. 아! 싫어하는 계절도 물어봐줄 걸 그랬나? "그랬구나 장미야. 그럼 장미는 싫어하는 계절이 있어?" 라고 물었다.
"싫어하는 계절도 없는데요? 저는 별로 ... 그런것에 관심이 없는데요?" 하고 갸우뚱한 상태로 날 계속 쳐다보다 사라졌다.
2. 국어시간에 문제에 대한 답을 말하는 발표시간이었다. 누가봐도 너무 쉬운 문제여서 너도 나도 다 손을 들었다. 장미 빼고.
그 문제에 대한 답은 '고마워' 3글자였다. 아마 누군가가 친절을 베풀면 뭐라고 답해야하나요? 라는 질문이었던 것 같다. 나는 일부러 장미에게 물어봤다. 장미는 말하지 않았다. 장미는 분명 정답을 알고있었다. 이미 주변에서 많은 아이들이 "정답은 고마워예요!" 라고 이미 스포를 하기도 했고, 장미도 그정도 수준은 충분히 된다. 장미는 말을 하지 않고 버텼다. 그날 따라 나는 장미가 발표를 하게 만들어야겠다는 의지가 생겼다. 그 상태에서 10분 20분 계속 대치상태였다. 공포스러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장미가 오늘 이 정답을 말해주면 우리반 체육 자유체육한다!" 아이들이 극도로 흥분상태가 돠었다. 모두가 장미의 입을 바라보며 "장미야! 화이팅! 제발 우리를 구원해줘!" 라며 너무나 순수하게 (?) 격려를 했다. 좀 오바액션을 하는 친구들은 "내가 이렇게 절 할게" 라면서 무릎을 꿇고 싹싹 비는 시늉을 했다. "장미야, 나를 따라서 한 글자씩 말해봐. 고! 마! 워!" 라며 말을 유도하는 아이도 있었다. 이미 자유체육을 따 놓은 듯 우리반은 축제 분위기였다. 그런 친구들이 재밌었는지 장미는 피식 웃기도 했다. 하지만 나와의 대치는 계속 되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겪는 상황인 것처럼 보였다. 나도 지지 않았다. 장미는 분명 고집을 부리고 있다. 20분 대치 끝에, 장미가 이 상황이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이 "하~!! 진짜. 고마워." 라고 정답을 속사포로 말하고 앉았다.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장미는 영웅이 되었다. 그리고 장미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장미는 그 이후에도 발표 참여도가 높아지진 않았다. ㅎ
3. 대 반전 에피소드다.
어느날 학예회를 대신한 장기자랑 날이 있었다. 꿈과 끼를 발표하는 자리이다. 아이들은 몇 주간 준비해 온 줄넘기, 리코더, 노래, 혹은 본인의 취미나 장래희망을 발표하는 자리다.
장미는 이날 춤을 춘다고 신청서를 냈다. 나는 장미의 춤 발표가 눈에 그려졌다. 아니, 우리 모두 장미의 발표가 눈에 그려졌다. 몸짓도 표정도 없고 다소 무기력해보이는 아이지만 아이돌을 좋아하는 장미. 춤 몇 동작을 하다가 누군가가 "와~! 하고 크게 반응하거나, 누군가가 웃어버리면 갑자기 -_-; 무표정으로 변해서 퇴장해 버리는 것이 상상되었다. 우리는 장미가 발표하러 나오자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잘 못 하더라도 열심히 박수 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장미는 무대를 찢었다.
아무 말도 아무 표정도 없었지만 몸사위가 아주 절도있으면서도 현란했다. 스텝의 반경도 넓었다. 앉았다 엎드렸다 누웠다가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웨이브도 과감했다.
아이들은 충격을 받았고 나를 쳐다보았다. 우리는 약속한 듯이 쥐죽은 듯 음악이 끝날 때까지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숨소리라도 내면 장미가 춤을 멈출 것만 같았다. 한 여자아이는 본인의 입이 다물어지질 않아 손으로 입을 막고 있었다.
그날 장미는 또 다시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 전혀 수줍음이라고는 없었다.
이렇게, 어떠한 이유로 발표는 죽어도 싫지만 차라리 솔로 댄스는 너무나 쉬운 아이도 있다.
장미야~ 어떻게 지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