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21 연재;한겨레 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사망 시각 19:34.”
나직이 뱉은 말이 병실의 공기를 울렸다. 잠시 진동하다 마침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가장 하고 싶지 않은 말이지만 할 수밖에 없는 말을 끝으로 아기의 삶이 저물었다. 부모에서 이제 유족이 된 가족의 반응을 알 수 없어 몸이 굳었다. 갑자기 엄마가 벌떡 일어났다. 누가 쫓아오는 듯 급박한 몸짓이었다.
“이제 기저귀를 갈아야겠어요. 우리 애가 젖은 기저귀를 싫어하거든요.”
내 몸이 움찔했다. 카메라 롤이 돌아가다 ‘탁’ 멈추는 그 순간처럼. 간호사의 눈빛이 눈에 보이게 흔들렸다. 아빠의 흐느낌도 영화 필름이 멈춘 듯 딱 그쳤다. 답답한 침묵 속, 엄마는 바쁜 손길로 아기 기저귀를 갈았다.
“이제 집에 가야겠어요. 카시트 이리 주세요.”
참다못한 아빠가 엄마를 안으며 아기 어르듯 달랜다.
“여보,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잖아요.”
엄마는 마치 유괴범이 헨리를 데려가기라도 하는 듯 아빠를 거칠게 막아섰다. 그는 쓰러질 듯 뒤뚱대며 겨우 몸의 중심을 잡았다.
“어머님, 헨리는 집에 갈 수 없어요. 원하는 만큼 여기서 헨리를 안고 계셔도 되지만, 헨리는… 헨리는 지하실로 가야 해요.”
차마 시체안치실로 간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래, 여보. 헨리는 곧 시체안치실로 가야 해. 거기 냉장고에 들어가야 해.”
헨리의 아빠는 매사 기계적이고 정확한 표현을 선호하는 사람이었다. 아빠의 단어 선택이 적나라해 조금씩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렇다고 딱히 틀린 말도 아니라서 고칠 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카시트가 있다고요. 카시트가 있으니까 이제 집에 갈 수 있어요.”
병원이 떠나가라 소리치는 엄마에게 어떤 위로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달래거나 말릴 수 있는 경지를 넘어선 엄마의 절규만 비명이 되어 새어 나왔다.
헨리는 꼬박 1년 가까이 신생아중환자실에서 갖가지 치료를 받았다. 부모도 언젠가는 헨리가 퇴원할 날을 꿈꾸며 갖은 고초를 견뎌냈다. 거듭된 폐 손상은 헨리를 지독하게 괴롭혔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산소포화도 변화만큼 엄마는 웃고 또 자주 울었다. 그래도 엄마는 언젠가 헨리와 함께 집에 가리라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한동안 산소줄만 필요했으나 헨리의 폐가 버티지 못해 다시 인공호흡기를 달자, 엄마는 주저앉고 말았다. 최대치의 치료가 꽤 오랫동안 지속됐다. 뿌연 바다 위의 안개처럼 시간이 흐르고 풀어지기를 반복했다. 시계 초침이 째깍대며 몰고 온 그 시간만큼 헨리의 폐가 치유될 줄 알았는데 시퍼런 색을 띠고 죽은 듯이 잠만 잤다. 그리고 결국 깨지 않았다.
병실 안에서 엄마와 아빠는 대치 중이었다. 아니, 총칼 없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헨리를 좀체 내려놓지 않는 엄마와 그런 엄마를 만류하는 아빠. 벽에 걸린 시계만 섧게 빛나고 있었다. 엄마를 위로할 수만 있다면 헨리를 곱게 단장해 카시트에 앉혀주고 싶었다. 카시트를 들고 웃으며 떠나는 그들을 나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어느 병원도 사망 선고가 방금 내려진 주검을 바로 내주지 않는다.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질 수만 있다면, 내가 병원장이 되어서라도 보내주고 싶었다.
꼬박 반나절을 맞서 버티던 엄마와 아빠는 결론에 다다랐다. 헨리를 집에 데리고 가지 않기로. 보통 아기 주검은 작은 바구니침대에 옮겨져 간호사가 그것을 들고 안치실로 내려간다. 엄마는 계속되는 아빠의 간청에 헨리를 품에 안고 지하실로 향했다. 간호사가 아니라 엄마가 직접 안치실로 헨리를 들여보냈다. 안치실 문이 닫히자, 엄마의 울음이 지하실 복도에서 메아리쳤다. 눈 뜨고는 못 볼 광경, 뚫린 귀도 틀어막고 싶은 악몽으로 넘실댔다. 헨리와 함께라면 평생이라도 안치실에 있으려는 엄마가 어둠에 지워지고 있었다.
2018년 여름, 어미 범고래 J35는 태평양에서 새끼를 낳았다. 새끼는 아마도 태어난 지 몇 분이 되지 않아 죽었거나, 이미 죽은 채로 태어났으리라. 어미는 죽은 새끼를 17일 동안 밀어 나르면서 1600㎞ 이상을 이동했다. 지친 어미를 도와 범고래 무리가 번갈아 새끼를 미는 모습도 보였다. 가까운 친척들은 어미를 둘러싸며 함께 이동했다. 과학자들이 연구한 이래 가장 긴 사례라고 한다.
J35는 자기를 추적하던 과학자에게 다가가 죽은 새끼를 보여주기도 했다. 애도의 여정을 알아달라는 듯이. 죽은 아기 범고래의 머리와 주둥이를 수면 위로 밀면서, 혹시라도 살아나리라 기대했을까. 아니면 죽은 새끼일지언정 버리고 갈 수 없는 어미의 마음이었을까. 강한 애착으로 차마 죽은 새끼를 놓아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기나긴 여행 중, 어미와 새끼 사이에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해졌을지도 모르겠다. 어미의 사랑 앞에서는 삶도 죽음도 뒤섞여 시간조차 아무 의미가 없었으리라.
내가 사랑하는 아이의 심장이 뛰지 않으면 어떠랴. 엄마에게는 아직 살아 숨 쉬는 아이인 것을. 내 사랑인 것을. 미국 시인 에밀리 디킨슨이 널리 알린 것처럼 세상엔 “사랑밖에 없다. 그것만으로도 차고 넘쳐서. 그 사랑의 무게만큼 자국이 짙게 남더라도.” 그곳에는 오직 사랑만 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그것, 엄마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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