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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울>에서 만나는 노자와 장자

우리의 인생은 꼭 뭘 해야만 하는걸까요?

꿈 속에 있으면서 그게 꿈인 줄 어떻게 알며, 흐름 속에 함께 흐르며 어떻게 그 흐름을 느끼겠는가? 꿈이 꿈인줄 알려면 그 꿈에서 깨어나야하고, 흐름이 흐름인 줄 알려면 그 흐름에서 벗어나야한다. -이문열 삼국지 中

   코로나로 인해서 정말 오랫동안 영화관에 가보지 못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맨날 집콕만 하다가 도저히 그 답답함을 버티기 힘든 수준이 될 때, 나를 참을 수 없게 하는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픽사라니! 인생 애니메이션 중 하나였던 코코 제작진이라니! 저 통통한 고양이의 뱃살하며, 몽글몽글한 유령 캐릭터에 난 홀린듯 예매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요즘 극장은 방역도 잘하고 사회적 좌석도 사회적 거리두기 잘 지켜지니까 괜찮을거야!' 그렇게 난 영화관으로 향했다.




  계약직 음악교사 '조'는 학교로부터 정규직 채용 소식을 들어도 그렇게 기쁘지 않다. 그의 관심사는 오직 위대한 재즈 뮤지션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꾸만 떨어지면서도 퇴근 후 그는 유명밴드 오디션에 도전하던 그가 원했던 포지션에 합격한 날 들뜬 마음에 주위를 살피지 못하고 사고로 가사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일생을 꿈꿔왔던 최고의 순간을 앞두고 삶이 끝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 그는 영혼들의 사망 수속에서 도망치던 중  '유 세미나'라는 곳에 불시착하게 된다. 유세미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영혼들의 인격이 형성되는 공간이다. 거기서 친절함, 까칠함, 자아도취 같은 성격들을 부여받고 있다.

귀여운 꼬마들의 천진난만한 장난에 아빠 미소가 지어진다 ^^;;;

  조는 준비된 영혼들을 따라 지구로 가보지만 자꾸만 영혼들의 세계로 돌아온다. 그건 지구통행증이 없기 때문!


  절망하던 조에게 유세미나 관리자로부터 일이 맡겨진다. 새 영혼들은 마무리 단계로 자신의 '영혼의 불꽃'을 찾아야 그간에 부여받은 성격뱃지가 '지구통행증'으로 바뀌는데, 조에게 그 과정을 돕는 '멘토' 역할이 부여된 것이다. (실제로 유세미나엔 인생을 살아본 훌륭한 영혼들이 멘토의 역할을 하기 위해 머무르는 경우가 있다보니 관리자들이 다른 영혼과 착각한 것.)

조에게 맡겨진 멘티 '22'

  조에게 맡겨진 영혼은 '22'라고 불리는 문제아다. 지구로 가기 싫어서 영혼의 불꽃 찾는걸 거부하는 뺀질이. 수도 없이 많은 위인들이 도전했지만 결국 포기할 정도. 그런데 이 부분에서 희망과 같은 이해관계가 합치된다. 22가 지구 통행증을 만들면 그걸로 조가 대신 지구로 돌아가는 것이다.

22가 영혼의 불꽃을 찾을 수 있도록 자신의 음악적 열정을 보여주는 조




  조와 22의 인생관은 양극단에 있다. 한쪽은 음악적 성취라는 목표에 대해 과몰입하고 있고, 나머지 한쪽은 그 어떤 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허무주의에 빠져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두 사람. 조의 가르침 역시 22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못한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22가 왜 그렇게 지구를 지루하다고 생각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훌륭한 멘토들이 자꾸만 뭔가를 '하기 위한(爲)' 열정을 가르치려했기 때문아닐까? 꼭 우리가 어린 아이들에게 자꾸 위인전을 사주면서 너도 저런 사람처럼 되어야한다고 말해주면 그 사람의 인생이 흥미롭게 느껴지지 않는 것 처럼...


  두 영혼이 어떻게 각자의 직면한 과제를 해결해나가는지에 대한 더 이상의 자세한 이야기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더 이상 말할 수 없지만, 이 작품에서 내가 느낀 감격이 독자분들께도 충분히 와닿을 수 있도록 도와줄 동양철학자를 소개하고 싶다.


  위(爲)라는 글자에서 눈치채셨겠지만, 무위(無爲)를 주장했던 제자백가 노자와 장자다. 이 둘의 생각을 묶어 '노장사상'이라고 하기도하고, '도가사상'이라고 하기도 한다. '도를 아십니까?'를 물어오는 길거리의 존재들 때문일까? 그들의 사상은 현실을 외면한 신비주의 추구로 사람들에게 오해받곤 한다.


  하지만 그들은 무위(無爲)인 상태를 애써 위(爲)하려고 하지 않았다. 장자가 물고기에게 가장 좋은 상태는 물 속에 있어서 물의 존재를 인식하지도 못하는 상태라고 했듯이 무위의 상태는 추구하거나 달성하는 것이 아닌 삶으로 누리는 것이다.


  영화의 가장 와닿았던 명대사는 '조'가 존경했던 뮤지션 '도러시아 윌리엄스'가 들려준 이야기였다. 나는 이 이야기가 도가사상의 핵심을 꿰뚫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린 물고기가 열심히 헤엄을 쳐가다가
앞서가고 있는 나이든 물고기에게 물었지. "바다는 어디있느냐"고.
나이든 물고기가 대답하길 "바로 여기가 바다야."
어린 물고기는 "여긴 그냥 물인데, 황홀한 바다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으나
어린 물고기가 헤엄치고 있던 그 물이 곧 바다였다.

  

  진정한 무위는 이렇듯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에 의해 완성된다. '목적' 그 자체인 삶을 무언가를 달성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시킬 때 우리는 스스로를 삶과 격리시킨다. 영화에서는 그러한 증상을 '길 잃은 영혼'으로 표현했다. 

나 역시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삶과 격리되어' 의미 없이 방황하는 길잃은 영혼들




  한 때 'Being'이 'Doing'보다 중요하다는 말이 유행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또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하면 Being을 할 수 있지?" 이 영화는 직관적이고 명확하게 노자와 장자가 전해주려했던 이야기를 그런 우리에게 전한다. 


  삶을 도구가 아닌 목적으로 받아들이자. 맛있는 것을 먹고, 걸으며 좋은 경치를 보고,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시간을 소중히하자. 그때 무위와 짝을 이루는 단어인 자연(自然)상태에 도달한다. 그 때 Being을 누릴 수 있게 된다.


멘토들은 다들 왜 그럴까? 영혼의 불꽃은 삶의 목적이 아니에요.
(그것은 삶을 살아가기 위한 원동력일 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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