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갈의 들판에 열두 지파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대관식이었다. 사무엘이 전국에 포고를 내린 지 한 달, 각 지파에서 장로와 병사와 백성이 길갈로 모여들었다. 들판을 가득 메운 인파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스라엘이 하나로 모인 것은 여호수아 이후 처음이라는 말이 나왔고, 그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사무엘이 단 위에 섰다. 노인의 음성이 들판을 가로질렀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가 이렇게 말씀하신다 — '내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올렸고, 모든 왕국의 손에서 너희를 건졌노라. 그런데 너희가 왕을 달라 하였으니, 이제 너희가 뽑은 왕 앞에 서라.'"
사무엘의 손이 군중 너머를 가리켰다. 모든 고개가 그 손끝을 따라 돌아갔다.
그런데 사울이 보이지 않았다.
웅성거림이 퍼졌다. 장로들이 두리번거렸다. 병사들이 고개를 빼고 이리저리 살폈다. 사무엘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이 무대에 주인공이 없었다.
"수레 뒤에 숨어 계십니다!"
누군가가 외쳤다. 들판 한쪽, 짐수레가 늘어선 곳에서 사울이 발견되었다. 수레와 수레 사이, 짐 보따리 뒤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거대한 남자. 키가 어깨 위로 한 뼘은 더 솟은 사내가 짐 뒤에 숨어 있는 꼴은 — 우스꽝스러우면서도 감동적이었다. 적어도 군중의 눈에는.
"저 사람 좀 보게! 왕이 될 사람이 수레 뒤에 숨다니!"
"겸손한 거야, 겸손한 거!"
"야훼께서 저런 겸손한 자를 왕으로 택하셨구나!"
군중이 감탄했다. 사무엘의 눈가에 다시 눈물이 어렸다. 야훼가 보내주신 겸손한 거인. 왕의 자리 앞에서도 두려워 숨는 순수한 영혼.
물론, 사울은 두려워서 숨은 것이 아니었다.
전날 밤, 아히노암이 말했다.
"내일 사무엘이 당신을 부르면, 바로 나가지 마요."
"왜?"
"바로 나가면 그냥 왕이에요. 숨어 있다 끌려 나가면 전설이 돼요. 백성들이 평생 기억할 장면을 만들어야 해요. '왕이 될 만큼 강하면서도 왕관 앞에서 숨을 만큼 겸손한 사람' — 이게 당신의 이미지예요. 수레 뒤에 숨어요. 누가 찾으면 마지못해 나오는 거예요."
사울은 수레 뒤에서 일어났다. 짐 보따리의 먼지를 털며, 일부러 머뭇거리는 걸음으로 단 앞에 섰다. 허리를 살짝 굽히고, 눈은 바닥을 보고, 그러나 어깨는 반듯하게. 겸손과 위엄의 배합. 아히노암이 설계한 정확한 비율.
사울이 군중 앞에 섰을 때, 모든 사람이 고개를 들어야 했다. 이스라엘 어디에도 이 사내만큼 큰 사람은 없었다.
사무엘이 선포했다.
"야훼께서 택하신 자를 보라! 온 백성 가운데 이만한 자가 없도다!"
"왕이여 만세!"
함성이 터졌다. 길갈의 들판이 진동했다. 뿔나팔이 울렸다. 사울은 고개를 숙인 채 — 아히노암이 가르쳐준 '감격에 겨운 겸손의 자세'로 — 함성을 받았다. 그리고 숙인 고개 아래에서, 보이지 않는 입꼬리가 올라갔다. 천천히. 무겁게. 왕관의 무게만큼.
* * *
왕관이 무거운 것은 처음 석 달뿐이었다.
대관식 이후, 사울에 대한 반응은 갈렸다. 일부는 환호했고, 일부는 코웃음을 쳤다. '베냐민의 저 건달이 우리를 구원하겠다고?' 하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사울에게 선물도 보내지 않았다. 사울은 이를 악물었으나, 아히노암이 말렸다.
"아직이에요. 지금 화내면 소인배가 돼요. 기회를 기다려요."
기회는 한 달 뒤에 왔다.
암몬 왕 나하스가 요르단 동편 야베스 길르앗을 포위했다. 나하스의 요구는 잔혹했다 — 항복의 조건으로 모든 주민의 오른쪽 눈을 빼겠다는 것이다. 야베스의 장로들이 사자를 보내 이스라엘 전역에 구원을 청했고, 소식을 들은 백성들이 울부짖었다.
사울이 밭에서 소를 몰고 돌아왔을 때, 기브아 거리에 울음소리가 가득했다. 소식을 전해 듣는 순간, 사울의 눈이 변했다. 밀실에서의 교활한 눈이 아니었다. 연무장에서의 연기하는 눈도 아니었다. 전장의 눈이었다.
이것만은 연기가 아니었다. 사울은 진짜로 싸울 줄 아는 사람이었고, 싸우는 순간만큼은 진짜였다.
사울이 소 한 쌍을 잡아 열두 토막을 내고 사자 편에 전국으로 보냈다. '사울과 사무엘을 따라 나오지 않는 자의 소는 이와 같이 될 것이다.' 위협이었다. 그러나 통했다. 야훼의 공포가 백성에게 임하여, 삼십삼만이 모였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사울은 선두에 섰다.
새벽 공격이었다. 사울이 칼을 뽑아 들고 언덕을 넘었을 때, 뒤따르는 병사들이 본 것은 석양도 아닌 새벽빛 속에서 불타는 거대한 실루엣이었다. 키가 크다는 것이 이 순간만큼은 진짜 무기였다. 사울의 칼이 허공을 갈랐고, 이번에는 어퍼컷이 아니라 내려치기였다. 암몬의 전열이 무너졌다.
정오까지 전투가 끝났다. 나하스의 군대는 궤멸했고, 살아남은 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둘이 함께 남은 자가 없었다.
피를 뒤집어쓴 사울이 야베스 길르앗 성문 앞에 섰을 때, 성벽 위에서 내려다보는 백성들의 얼굴에 경외가 서려 있었다. 이것은 조작된 겸손이 아니었다. 이것은 진짜 칼이었고, 진짜 피였고, 진짜 승리였다.
"사울은 왕이 될 수 없다고 했던 자들을 끌어내라! 우리가 죽이겠다!"
환호하는 군중 속에서 보복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사울을 조롱했던 자들을 처단하자는 요구였다. 사울이 손을 들었다.
"오늘은 야훼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날이다. 오늘은 아무도 죽이지 않는다."
관용이었다. 군중이 다시 한 번 환호했다. 사무엘은 단 위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이것이 내가 기름 부은 왕이다. 용맹하되 관대한 자.
그러나 관용의 뒤편에는 아히노암의 계산이 있었다. 전날 밤, 천막 안에서.
"이기면 반대파를 죽이자는 소리가 나올 거예요."
"그래야지. 본때를 보여줘야 다음에 안 까불잖아."
"안 돼요. 지금 죽이면 '잔인한 왕'이 돼요. 살려두면 '관대한 왕'이 돼요. 관대한 왕이 더 무서운 거예요. 빚을 지게 만드는 거니까. 살려준 사람은 평생 사울왕에게 빚진 사람이 되는 거예요."
사울은 아내의 말을 따랐다. 언제나 그랬듯이.
* * *
암몬 전쟁의 여파가 가시기도 전에, 블레셋이 남쪽 국경을 건드렸다.
소규모 충돌이었다. 블레셋 척후대가 벧호론 고개를 넘어 베냐민 지파의 변두리 마을을 약탈한 것이다. 사울은 즉각 출격했고, 험준한 고갯길에서 블레셋 척후대를 몰아냈다. 전과는 크지 않았으나, 속도가 빨랐다. 소식이 전해지기도 전에 사울이 이미 칼을 빼들고 국경에 서 있었다는 소문이 퍼졌고, 소문은 사실보다 언제나 크기 마련이었다.
"사울왕이 블레셋도 때려잡았다더라!"
"암몬 이어서 블레셋까지? 이 양반 진짜 야훼의 사람인가 봐."
의구심이 환호로 바뀌고 있었다. 대관식 때 코웃음 쳤던 자들이 하나둘 입을 다물었다. 사울의 칼은 의심을 자르는 데에도 쓸모가 있었다.
사울은 도취되기 시작했다.
두 번의 승리 — 암몬과 블레셋 — 는 사울에게 위험한 확신을 심었다. 나는 이기는 사람이다. 나의 칼은 틀리지 않는다. 기름 부음은 연기로 받았을지 모르지만, 전쟁의 승리는 진짜다. 진짜가 가짜를 덮어주는 것이다.
이 확신은 사울의 어퍼컷을 더 거칠게 만들었다. 궁정으로 돌아온 사울은 연무장에서 부하들 앞에 서는 횟수가 잦아졌고, 목소리는 더 커졌으며, 주먹은 더 자주 허공을 갈랐다. 기브아 사람들은 환호했다. 왕의 어퍼컷이 곧 승리의 증표인 시절이었다.
사무엘이 기브아를 방문했다. 사울에게 조언하기 위해서였다.
"왕이여, 전쟁의 승리는 야훼께 속한 것이오. 왕의 칼이 이긴 것이 아니라, 야훼의 뜻이 이긴 것이오. 교만하지 마시오."
사울은 사무엘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겉으로는. 그러나 노인이 돌아간 뒤, 사울은 아히노암에게 말했다.
"노인의 잔소리가 점점 길어져."
아히노암이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사무엘은 잔소리하는 노인이 아니라, 언젠가 처리해야 할 변수였다. 그러나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당신은 그냥 웃으면 돼요. 노인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뒤에서는 우리 일을 하면 돼요."
"언제까지 그 늙은이 눈치를 봐야 하는 건데?"
아히노암의 눈이 가늘어졌다.
"늙은이가 죽을 때까지요. 아니면 — 우리가 늙은이보다 강해질 때까지요."
* * *
전쟁은 피를 흘리는 일이었고, 전쟁 뒤의 일은 피보다 진한 것을 흘리는 일이었다 — 은을.
암몬 전쟁과 블레셋 국경전의 전리품으로 토지가 들어왔다. 암몬이 점령했던 요르단 동편 땅, 블레셋에서 되찾은 남쪽 변경의 목초지. 이 토지들은 원래 백성에게 고르게 돌아가야 할 것이었다. 전쟁에서 피 흘린 병사들, 가족을 잃은 유족들, 약탈당한 마을 사람들에게.
아히노암의 생각은 달랐다.
"토지는 곧 권력이에요."
아히노암이 양피지 위에 기브아 주변 지도를 펼치며 말했다. 자정이었다. 요나단이 잠든 줄 아는 시각. 기름등 하나가 아히노암의 손가락 끝을 비추고 있었다.
"전리품 토지를 우리 사람들에게 몰아줘요. 장군 아브넬에게 야베스 길르앗 동쪽 목초지. 기브아 장로 벤하일에게 벧호론 남쪽 밀밭. 도엑에게 남쪽 변경의 올리브 동산. 토지를 받은 사람은 우리 사람이 되는 거예요. 평생."
사울이 턱을 긁적였다.
"병사들이 불만을 가지지 않겠어?"
"병사들에게는 '왕의 은혜로운 분배'라고 포장하면 돼요. 실제로 좋은 땅은 측근에게, 나머지 자투리를 병사들에게 나눠주면 돼요. 양이 적어도 '왕이 직접 나눠주셨다'는 사실 자체가 감사의 대상이 되는 거예요. 사람들은 받은 것의 크기보다 준 사람의 직위를 기억하거든요."
아히노암의 손가락이 양피지 위를 미끄러졌다. 토지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충성을 설계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가 중요해요."
아히노암의 손가락이 기브아 남쪽, 에브라임 지파와의 경계선 근처를 짚었다.
"이 땅은 원래 주인이 있어요. 에브라임 지파의 소작농 마흘론이라는 사람이 삼대째 경작하고 있는 땅이에요. 그런데 이번 전쟁 때 이 사람이 징집을 피했어요. 기록에 남아 있어요."
"징집을 피한 자의 땅을 빼앗는다?"
"빼앗는 게 아니에요. '국방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자에 대한 정당한 제재'예요. 왕의 이름으로 토지를 환수하고, 우리 사람에게 넘기면 돼요. 이게 한 건 두 건 쌓이면 — 기브아 주변의 좋은 땅은 전부 우리 사람의 것이 되는 거예요."
사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번에는 천천히가 아니라 빠르게. 아내의 계산이 마음에 든다는 표시.
"당신은 참 머리가 좋아."
"머리가 좋은 게 아니라, 눈이 좋은 거예요. 남들이 땅을 볼 때 나는 사람을 봐요."
* * *
토지 분배가 시작되자, 기브아 궁정 앞에 줄이 생겼다.
처음에는 장군들이었다. 전쟁에서 공을 세운 장수들이 왕을 알현하여 토지 배분을 요청했다. 사울은 칼을 잘 쓰는 자에게 후하게 베풀었다. 이것은 나쁘지 않았다. 장수에게 전공의 대가를 치르는 것은 왕의 당연한 도리였으므로.
그러나 줄은 점점 길어졌고, 줄의 성격이 변하기 시작했다.
장군 뒤에 장로가 섰다. 장로 뒤에 상인이 섰다. 상인 뒤에 제사장이 섰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토지만이 아니었다. 관직이었다. 세금 징수관, 곡식 창고 관리인, 국경 초소 지휘관, 왕실 보급관 — 새로 세워진 왕국에는 채워야 할 자리가 많았고, 자리는 곧 돈이었다.
이 줄의 끝이 아히노암에게 닿아 있었다.
아히노암은 왕을 직접 만나기 어려운 자들을 위한 '통로'가 되어주었다. 아히노암의 밀실에 면포 열 필을 들고 오면 왕에게 이름이 전해졌고, 은 스무 세겔을 들고 오면 왕과의 면담이 잡혔다. 올리브유 서른 통을 들고 오면 — 관직이 내려졌다.
"이것은 뇌물이 아니에요."
아히노암은 밀실을 찾아온 이들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
"왕에 대한 충성의 표시예요. 충성하는 자에게 왕이 은혜를 베푸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요."
말은 아름다웠다. 그러나 기브아 골목에서 백성들이 속삭이는 말은 달랐다.
"아히노암 마님한테 줄을 서야 자리가 나온다더라."
"인사 청탁이 시장판이 됐어. 관직을 은으로 사는 거야."
"전쟁에서 피 흘린 놈은 빈손이고, 은 있는 놈이 자리를 차지하네."
속삭임은 아직 작았다. 사울의 칼이 만든 승리의 환호가 속삭임을 덮고 있었다. 그러나 속삭임은 풀씨와 같았다 — 돌틈에 박혀 보이지 않다가, 비가 오면 싹을 틔우는.
* * *
요나단은 열여섯이 되었다.
키가 자랐다. 아직 아버지에게는 미치지 못했으나, 또래 소년들 사이에서는 한 뼘 이상 솟아 있었다. 어깨도 넓어졌고, 칼을 잡는 손에 굳은살이 박이기 시작했다. 사울의 아들이라는 말이 칭찬처럼 들리는 나이였다.
암몬 전쟁 때, 요나단은 처음으로 전장에 나갔다.
뒤편이었다. 보급대 호위가 요나단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칼을 뽑을 일은 없을 것이라고 아버지가 말했다. 그러나 전장이라는 것은 뒤편이라고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암몬의 패잔병 열여섯 명이 보급대를 습격했을 때, 요나단의 칼이 처음으로 사람의 살을 갈랐다.
손이 떨렸다. 피가 칼날을 타고 흘러 손목까지 적셨다. 구역질이 치밀었으나, 요나단은 참았다. 뒤에 보급품이 있었고, 보급품 뒤에 부상병이 있었다. 부상병을 지키는 것은 자부심의 문제가 아니라 당연한 일이었다.
전투가 끝난 뒤, 아버지가 본진에서 달려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들이 패잔병을 상대했다는 보고를 받고. 사울의 얼굴에 두 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 아들에 대한 걱정과, 아들이 싸울 줄 안다는 확인. 사울은 요나단의 어깨를 잡고 힘주어 흔들었다.
"잘했다, 요나단. 네 칼이 베냐민의 칼이다."
요나단의 가슴이 뜨거워졌다. 아버지의 손이 어깨 위에서 진동하고 있었다. 이 순간만큼은 진짜였다. 아버지의 눈에 교활함도, 계산도, 연기도 없었다. 전장에서의 사울은 밀실에서의 사울과 다른 사람이었다. 칼을 쥐면 거짓이 벗겨지고 날것의 사내가 드러났다.
요나단은 이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었다. 전장의 아버지를.
* * *
그러나 궁정으로 돌아오면 냄새가 달라졌다.
요나단이 기브아에 돌아올 때마다, 어머니의 밀실 앞에 줄이 서 있었다. 면포를 든 장로, 은주머니를 움켜쥔 상인, 양피지 두루마리를 품에 안은 서기관. 그들은 요나단과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숙였으나, 눈빛은 숙이지 않았다. 거기에는 탐욕과 계산이 섞여 있었고, 요나단은 그 눈빛의 냄새를 알았다. 어머니의 밀실에서 풍기는 것과 같은 냄새.
어느 날 저녁, 요나단은 아버지의 방으로 갔다.
"아버지, 어머니 방 앞에 매일 사람들이 줄을 서는데, 무슨 일이에요?"
사울이 칼을 닦다가 손을 멈추었다. 잠깐이었다. 칼날 위에 기름을 바르는 손이 반 박자 멈춘 것이다. 연무장에서 밀가루 위를 걸을 때 요나단이 포착한 것과 같은, 그 반 박자.
"네 어머니가 궁정 살림을 돌보는 거다. 왕비가 해야 할 일이지."
"살림이요? 그런데 들고 오는 것만 있고, 들고 가는 것은 안 보이던데요."
사울의 손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칼날 위의 기름이 번들거렸다.
"요나단."
"예."
"넌 전장에서 잘 싸웠다. 그 칼솜씨면 장차 훌륭한 장수가 될 거다. 장수는 칼에 집중하면 된다. 궁정의 일은 궁정 사람들이 할 테니."
대답이 아니었다. 방향 전환이었다. 칭찬으로 질문을 덮는 기술. 사울이 연무장에서 군중에게 쓰는 것과 같은 기술이었다. 그것을 이제 아들에게 쓰고 있었다.
요나단은 방을 나왔다. 복도를 걸으며 어머니의 밀실 앞을 지나쳤다. 문틈으로 아히노암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세금 징수관 자리요? 좋아요, 준비된 것은 뭐예요? 면포 열 필? 그건 좀 적은데…… 올리브유를 더 얹으면 이야기가 되겠네요."
요나단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멈추면 더 들릴 것이고, 더 들으면 더 알게 될 것이고, 더 알면 — 아버지를 더 미워하게 될까 봐.
아니, 미워하게 될까 봐가 아니었다. 더 정확하게는, 전장에서 사랑한 아버지와 궁정에서 냄새나는 아버지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될까 봐.
요나단은 자기 방으로 돌아가 칼을 꺼냈다. 암몬 전쟁에서 처음 피를 묻힌 칼. 그 칼을 닦으며 소년은 생각했다.
전장에서의 아버지는 진짜였다. 칼을 쥔 아버지의 눈에는 거짓이 없었다. 그런데 칼을 내려놓는 순간, 아버지의 손에는 다른 것이 쥐어졌다 — 은, 양피지, 그리고 어머니의 계산.
승리의 환호가 아직 기브아의 거리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 환호 아래에서, 코를 찌르는 냄새가 조금씩, 조금씩, 올라오고 있었다.
요나단은 칼을 집어넣었다. 칼은 깨끗했다. 칼만큼 깨끗한 것은 이 궁정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