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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동화'

국방일보 병영칼럼 6

by 이형걸

봄바람에 설레는 마음으로 모처럼 서울 혜화동 대학로에서 연극을 보았다.

줄거리는 이러하다. 매번 출판사에서 문전박대 당하는 무명의 작가가 8번째 외면당하자 하늘에 대고 외친다. “7전 8기라고 하는데 왜 8번째도 넘어지냐!” 실의에 빠지고 좌절한다. 어느 날 길을 걷다가 고리대금업자가 이자를 갚지를 못한 한 남자를 괴롭히는 것을 목격하고서, 어릴 적 동화 ‘토끼와 거북이’ 우화를 떠올리며 약자를 강자로 만들어 멋지게 복수하는 소설을 구상한다. 엉금엉금 기어가는 거북이가 날쌔게 뛰어가는 토끼를 이기는 것은 현실성이 없고, 개연성도 없으며, 잠자는 토끼를 한번 이겼다고 승자라고 할 수 없으니 당당하게 거북이의 능력으로 이길 수 있도록 줄거리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거북이의 강점과 약점을 찾아내기에 분주하다. 먼저 체력이 문제라는 분석 결과가 나오고, 군대에 입대한 거북이는 유격훈련과 낙하산 강하 등 특수요원 버금가는 체력훈련에 돌입한다. 자신감이 붙은 거북이는 토끼에게 경주를 요청한다. 하지만 토끼에게 사정없이 짓밟히고 만다. 토끼는 가소롭다는 듯이 큰 소리로 웃는다. 고민 끝에 체력도 중요하지만 강한 정신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작가는 ‘랩 베틀’을 시킨다. 거북이는 상대방의 ‘인신 공격’에 어찌할 바를 몰라 위축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반격한다. 멘탈은 점차 강해진다. 정신력과 체력, 모두 갖췄다고 결론 내린 거북이는 토끼에게 도전했지만, 역시 지고 만다. 작가는 거칠게 분노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이겨야 한다고 마음먹는다. 목표는 오직 이기는 것. 그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고려하지 않게 된다. 토끼를 불러 협박에 공갈을 더한다. 군대에서 다친 거북이가 토끼의 잘못이라고 우기며 작가는 토끼에게 감옥에 가던지, 아니면 다리 하나를 내놓을 것인지 선택하라고 강요한다. 토끼는 앞다리 묶고 달리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번에도 거북이가 이길 수가 없었다.


작가는 완전 ‘멘붕’에 빠지고 미치기 일보 직전에 번쩍! 전혀 다른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거북이는 바다의 동물, 토끼는 땅의 동물, 문제는 바로 그것이었다. 유레카! 작가는 토끼를 해변으로 불러내고 바다에서 경주가 시작된다. 아니나 다를까. 토끼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 채 물을 먹고 허우적거리고, 거북이는 잠수하고, 수면으로 부상하고, 좌우 회전에 뒤로 가고, 옆으로 가고, 온갖 묘기를 부리며 그동안 토끼에게 당한 복수라도 하듯 토끼를 희롱하며 마침내 경주에서 승리한다. 토끼는 경주 중 익사한다.


승리를 쟁취한 작가는 원고를 탈고한다. 만면에 흡족한 웃음을 띠며, 출판사로 가는 길에 쓰러져 있는 한 남자를 발견한다. 고리대금업자에게 맞은 그 남자였다. 그런데 몸은 식어 싸늘하다. 작가는 한참 동안 그를 내려다보며 머뭇거리고 있다. 잠시 후 무대에 조명이 꺼지고 ‘마지막 동화’는 끝났다. 연극이 끝났지만, 나의 마음은 머뭇거리고 있다. 약자가 멋지게 복수했다? 거북이와 토끼의 경주는 땅에서도, 바다에서도 종목이 다른 불공정 경기 아니었던가. 폭력을 담은 불공정이 전복되었지만, 폭력이 이어질 때, 내면의 분노가 자신의 성장을 위한 양분이 아니라 독약이 되어 갈 때, 우리의 모습은 어떻게 변해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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