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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공원의 오래된 기억

국방일보 병영칼럼 7

by 이형걸

지금 서울 여의도에 벚꽃이 절정이다. 하중도(河中島)인 여의도는 1970년대부터 개발이 시작되어, 국회, 방송사, 증권거래소, 63 빌딩,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대한민국의 정치, 금융, 미디어의 중심지가 됐다. 현재의 모습이 되기 전, 여의도에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활주로가 차지하고 있었다니 상전벽해다. 활주로는 일제가 만주-조선-일본의 민간 항로를 개설하고자 건설했다지만, 실상은 대륙 침략의 교두보를 만든 셈이었다. 일제가 물러나고 ‘여의도 공항’이 생겼다. 항공 수요가 점차 늘어나고 국제공항이 필요해, 김포공항과 인천공항이 대신하면서, 여의도 활주로는 도로가 되고 건물의 기초가 되었다. 한때 활주로는 ‘5·16 광장’이란 이름으로 비상활주로와 국군의 날 행사를 해냈다. 이제는 그 자리에 ‘여의도 공원’이 시민들의 생태교육과 문화공간, 그리고 건강한 휴식처가 되고 있다. 그곳에 눈여겨볼 만한 2개의 상징물이 있으니 ‘공군 창군 60주년 기념탑’과 ‘C-47 수송기’이다.


4개의 기둥이 일심동체(一心同體)가 되어 하늘로 상승하는 형상의 기념탑 표지석에는, ‘이곳 여의도는 대한민국 공군 최초의 비행단이 위치했던 곳입니다.’라고 적혀있다. 해방 후 남북 분단의 불안한 정국 속에서 1949년 공군이 창설되었다. 그런데 잠자리 모양의 L-4 소형 연락기가 고작이어서 온 국민이 나서 당시 중형 훈련기 T-6 10대를 캐나다에서 사 와, ‘건국기’라고 이름 붙이고, 이곳에서 공군에 건네주었다. 결국 6·25 전쟁이 일어났고, 남쪽으로 밀렸던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하자, 공군은 여기에 공군본부를 설치하고, ‘건국기’와 주일 미군에서 급히 가져온 F-51 무스탕 전투기 10대를 전력으로 삼아, 북쪽을 향해 연일 출격하며 전시 항공작전을 지휘하였다. 전선이 북상함에 따라 전투비행부대는 ‘평양 미림기지’까지 전개하였다. 1971년까지 여의도는 공군의 최전방 기지였다.


여의도 활주로는 공군의 발자취뿐만 아니라 항일독립운동의 열망과 소원이 담겨있다. 최초의 민간 비행사인 안창남은 고국 방문 시범 비행을 여기에서 펼쳤다. 조선의 지도가 그려진 금강호를 타고 여의도 상공을 날자, 사람들은 “떴다! 보아라, 안창남”을 외치며 식민지 설움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공군 기념탑 옆 C-47 수송기는 일왕이 항복을 선언한 3일 후, 광복군이 긴급하게 국내로 들어왔을 때 탑승한 비행기이다. 광복군 정진대장 이범석과 김준엽, 노능서, 장준하 4명이 미군 전략정보처 OSS 대원 18명과 함께 중국 시안(西安)을 이륙하여, 여의도에 착륙하였다. 일본군의 무장해제, 일본 징병 한인 인수, 국민 자위단 조직 그리고 정보 수집 등 즉, 일본 항복 예비접수를 위한 선발대였다. 그러나 일본군과 대치상황을 유지하다가, 이튿날 중국 산둥성으로 돌아갔다. 그해 11월 김구 주석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이 정부 자격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환국할 때, 탑승한 비행기가 또한 C-47 수송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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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이 만발한 길을 지나 여의도 공원, 그곳에 가면 해외에서 오직 광복을 위해 고단한 삶을 살았던 독립전쟁 영웅들과 창군 초기 열악한 여건을 극복하고 6·25 전쟁에서 조국의 하늘을 수호했던 공군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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