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일보 병영칼럼 9
지인의 권유로 영화 ‘와일드’를 봤다. 영화는 바위 위에 앉은 주인공이 잔뜩 찡그린 채 등산화를 벗는 모습에서 시작된다. 엄지발가락은 피에 짓 물리고, 발톱이 반쯤 떨어져 너덜거린다. 눈을 질끈 감고 비명과 동시에 엄지발톱을 빼버린다. 동시에 등산화 한 짝이 벼랑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벼랑 쪽을 한참 내려다보더니 욕을 내뱉으며 나머지 한 짝마저 던져 버린다. 훈련 도중, 전투화가 발에 맞지 않아 물집이 생기고 발톱이 살 속으로 헤집고 들어온 기억이 떠올라 고통이 고스란히 전달됐다. 영화의 첫 장면부터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것보다 더 험한 극한의 환경에서 주인공이 치러야 할 고난과 역경이 예상됐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실제 주인공은 미국 여성 세릴 스트레이드. 그는 1995년 약 3개월 동안 미국 PCT(Pacific Crest Trail)를 도보 여행하였고, 영화의 소재가 됐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이니 주인공의 파란만장한 이야기에 공감해야 하는데, 솔직히 그것보다는 PCT의 코스에 놀랐고, 그 길을 주인공이 갔고, 여전히 많은 사람이 그 길을 간다는 사실에 또 놀랐다. PCT는 장장 4,286Km. 멕시코 국경에서 시작하여 샌디에이고,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시애틀을 지나 캐나다 국경까지 이어진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418Km, 요즘 자주 접하는 산티아고 순례길이 약 800Km이다.
충남 계룡에서 근무하던 시절, 관사가 아닌 대전 시내에서 출퇴근한 적이 있다. 신록의 5월과 단풍의 10월이 너무 아름다운 길이었다. 계룡대를 떠나게 되자 그 길을 천천히 걸어서 가보고픈 생각이 들었다. 25Km 거리를 만만하게 생각하고, 집을 나섰다가 8Km 정도에서 버스 타고 되돌아온 사실이 있다. “내가 미쳤지” 하면서.
PCT는 워낙 장거리인 데다 야생의 길이기에 방울뱀, 곰을 만나고 수상한 사람을 만나고 방향을 잃고 위험한 상황에 빠지고 중도에 포기한 자가 적지 않다. 코스 중간중간에 마을과 산장들이 있고 그곳에서 몸을 추린 다음, 다시 짐을 꾸리고 이동하는데, 도중에 계절이 바뀌기 때문에, 옷, 식량, 물품 등을 미리 다음에 도착할 산장으로 부친다. 보급이 완주의 성패를 좌우한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처음 출발할 때 배낭을 지고 일어서지도 못해 수차례 주저앉고, 야영은 무서워 불을 껐다 켰다를 반복하면서 잠을 이루지도 못한다. 친절을 가장한 남자를 만나 불안에 떨고, 정말 친절한 노인을 만나 도움을 받기도 한다. 두렵고 고통스러울 때마다 그의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들이 오버랩된다. 힘들면 그냥 포기하면 그만이라는 유혹이 끝까지 따라붙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실제로 PCT를 가는 사람들은 트레킹 하는 내내 “내가 이 짓을 왜 하지”하는 오만가지 생각이 드는데, 그 생각의 올가미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딱 2가지라고 한다. 트레킹을 그만두거나, 종착역에 도착하거나. 세릴 스트레이드는 자기 몸집만 한 배낭을 메고 그 멀고 험한 길을 선택했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갔다. 무엇이 그렇게 하게 했을까? 5월 가정의 달에 영화 한 편을 추천하라면 ‘와일드’다. 특히 ‘엄마’가 생각난다 싶으면 ‘강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