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청연, 그리고 권기옥

- 항공 선각자 이야기 권기옥 편 2.

by 이형걸

그들이 태어난 시대는 격동의 20세기가 시작된 1901년이었다. 지난 세기부터 이미 세계열강들은 서로 경쟁하듯이 식민지를 강탈해 나가고 있었으며 결국은 세계 제1차 대전으로 폭발하고 만다. 조선 말엽 중국 명나라를 사대하던 조정은 세상의 변화를 뒤늦게 이해하고 신문물을 받아들이며 미국, 러시아, 청나라, 그리고 일본의 틈바구니에서 부국강병을 꾀하였으나 이미 일본의 야욕을 벗어날 수 없었다. 1910년, 나라의 주권을 뺏기고 만다. 1905년, 일본이 조선의 외교권을 갖는다는 을사늑약 이후, 조선의 지식인과 젊은이들의 참담함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어떤 이는 목숨을 끊어 비통함을 남겼으며, 어떤 이는 고국의 땅을 떠나 중국이나 만주, 멀리 미국, 하와이까지 망명을 떠나기도 하였다. 어떤 이는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는 민중의 각성과 계몽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교육에 전념하기도 하였다. 좀 더 적극적인 민족 항거도 있었다. 바로 1909년 10. 26, 하얼빈 역에서 거행한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이다.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지만 1910년 한일병탄을 막지는 못했다. 이러한 민족의식의 총합은 드디어 1919년 3·1 만세운동으로 귀결된다. 이것은 식민지 국가가 세계만방을 향해 조선이 독립 국가임을 비폭력적으로 선언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3·1 독립선언 후 민족 지도자들은, 그 해 4월 우리 땅이 아닌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설립하고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간다.

이 시기에 국제 사회는 어땠을까.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동아시아에서 급속히 성장한 일본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1921년 워싱턴에서 국제회의가 열렸다. 총 9개국이 참여해 열강 각국의 해군력 축소에 합의했다. 한국도 대표단을 구성하고 한국의 독립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그들은 한국의 독립에는 관심이 없었다. 열강들은 서로 견제할 뿐 그들이 지배하고 있는 여러 식민지 국가들의 독립은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태평양에 관한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의 4개국 조약이 체결되고 일본이 차지하고 있는 산둥반도의 중국 반환이 결정되고 영일 동맹이 폐기되었으나 나머지 일본의 이익은 보장되었다.


한반도 전역에서 일어났던 3·1 독립선언 이후 일본은 식민지 지배정책에 변화를 시도한다. 일본 정치지도자들은 더 이상 무단통치는 어렵다고 판단하고 식민지 조선을 다룰 수 있는 유화적인 손길을 내민다. 조선을 식민지로 볼 것이 아니라 일본의 연장선으로 보겠다는 것이다. 조선 백성의 지식수준을 인정하여 근대문명의 정책을 펼치겠다는 이른바 문화통치를 내세운다. 총독부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신문 발행을 허가한다. 헌병은 경찰로 흡수되고 조선인 관리에 대한 급여도 올린다. 공립 보통학교 교장에 조선인도 임용될 수 있도록 했고, 관리와 교원의 제복을 폐지하고, 차고 있던 칼은 당연히 차지 못하도록 하였다. 겉으로 보면 앞선 무단통치와는 다른 듯하나, 차별에 대한 근본 제도와 논리는 고스란히 유지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역사의 왜곡이었다.

일본의 조선 지배에 항거했던 1920년대 조선의 젊은이들은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 지금의 청소년이나 그때의 청소년이나 크게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자신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면서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불안과 방황이 있다면 때로는 희망과 열정을 갖기도 했을 것이다. 그때의 젊은이들은 아마 대부분 세상에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일제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나라가 없는 것을 당연시 여기고, 개인의 미래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인의 차별을 직접적으로 체험하거나 부모님이나 학교로부터 조선의 역사를 배웠다면 아마도 주권 국가란 어떤 것일까 라는 자주적인 생각을 가졌을 것이라고 본다. 1919년 조선의 민중들은 조선 반도 곳곳에서 대규모 비폭력 만세 시위를 했다. 3·1 독립선언 만세운동이다. 3·1 만세운동 당시 평양 숭의여학교 학생이었던 권기옥의 생각과 행동도 이와 같았다.


권기옥은 1901년 1월 평안남도 평양부 상수 구리에서 부친 권돈각과 모친 장문명의 4녀 1남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12살에 숭현소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하고 이내 숭의여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기옥의 숭의여학교 진학은 그의 일생에 크나큰 전환점이 된다. 교사 박현숙의 권유로 ‘송죽회’에 가입한다. 그의 나이 18세이다. 송죽회는 1913년 평양에서 조직되었던 여성 독립운동단체이자 비밀결사대로서 정체를 드러나지 않기 위해 점조직 화했고, 새로운 회원은 전원의 찬성이 있어야 가능하며 중앙회 조직인 송(松) 계열과 지방 하부조직인 죽(竹) 계열로 활동하고 있었다. 초대 회장은 김경희, 2대 회장은 황에스터, 3대 회장은 박현숙이며 이들은 태극기를 제작하고 애국가를 등사하여 1919년 3월 5일 평양 시민 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하였으며, 임시정부 연락원들과 함께 공채를 판매하며 독립군 자금 모금을 비밀리에 수행하였다. 3. 1 운동 이후 임시정부 요원으로 활약하다가 1920년에 죽은 초대회장 김경희에 대한 임시정부의 추도사에 의하면 이 회에서 독립운동 자금으로 저축한 금액이 600여 원에 달하였다고 하니 송죽회 회원들이 얼마나 착실하게 그리고 얼마나 독립에 대한 간절한 소망으로 활동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기옥은 3·1 독립운동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주일 구류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기옥은 그 해 10월 다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다시 6개월 동안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풀려나왔다. 이제 기옥은 일본 경찰의 요주의 인물이 되었으며 항상 감시의 눈길이 따라다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양 여성 전도회’라는 기독교 종교단체를 만들어 겉으로는 선교활동을 하고 안으로는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활동을 계속하였다. 1920년 8월 평안남도 도청과 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에 가담하게 된다. 기옥은 다시 일본 경찰이 시시각각 체포하러 다가오자 조선을 벗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른다. 급기야 그 해 9월 조선을 탈출하여 중국에 망명한다. 기옥의 나이 20세. 아직 소녀티가 남아 있고 꽃길만을 걷고 싶은 어린 나이에 말과 글이 다르고 물과 공기가 낯선 이역으로 떠난 것이다.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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