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 선각자 이야기 권기옥 편 3.
중국에서 기옥은 새로운 방식의 항일 무장투쟁에 나선다. 그것은 중국 공군에 입대하여 하늘로 날아가 일본의 심장인 도쿄에 폭탄을 떨어뜨리겠다는 맹렬한 각오를 보인다.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간 기옥은 손정도, 안창호, 노백린 그리고 김순애를 만났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비로소 알게 된다.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을 만나고서는 어릴 적 평양 능라도에서 보았던 미국인 비행사 아트 스미스의 비행을 보고 받았던 충격이자 감동이 되살아났다. 당시 노백린은 미국 캘리포니아 북부에 있는 작은 도시 윌로스(Willows)에 한인 비행대를 창설하고 조종사를 양성하던 중이었다. 그러나 윌로스 한인 비행 양성소는 심각한 재정난으로 휴교 상태였다. 그리고 중국에서 조선인을 받아 줄 수 있는 비행학교는 좀처럼 찾을 수가 없었고 더욱이 여성을 비행사로 양성하겠다는 곳을 찾는 것은 생각조차도 쉽지 않았다. 기옥은 우여곡절 끝에 중국 남쪽 윈난 성 곤명에 있는 운남 비행학교에 들어갔다.
윈난 성은 군벌 당계요가 지배하고 있었는데 임시정부 요인 이시영이 기옥을 위해서 당계요 앞으로 써준 추천서의 힘을 얻어 운남 비행 학교장의 강력한 반대를 극복하고 입교하였다. 기옥이 멀리 운남 비행학교까지 가야 했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북경 근교에 남원 항공학교, 보정 항공학교가 있었고, 광주에 광주 비행학교가 있었다. 당시 광주 비행학교와 보정 항공학교에는 비행기가 없었고, 국립이었던 남원 항공학교는 외국인인 데다 여성이라는 점 때문에 입교가 어려웠던 것 같다. 상하이에서 해남으로, 멀리 베트남을 돌아 곤명에 있는 운남 비행학교에 간 기옥은 이곳에서 2년 넘게 비행술을 익히고 1925년 2월 드디어 졸업하고 대망의 조종사 자격증을 획득한다. “비행기에 폭탄을 싣고 날아가서 조선총독부와 천왕궁을 폭파하리라.” 1920년 중국 상하이에서 처음 만난 도산 안창호와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 장군에게 한 말을 실현할 수 있는 목표에 기옥은 이제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선 것이다. 당시 졸업자 중 한국인은 장지일, 이용무가 있었고, 이춘은 중도 탈락하였다. 운남 비행학교에는 20여 대의 비행기가 있었는데 연습기는 프랑스제 80마력 코드롱 복엽기와 150마력의 브리케이트 단발기, 이탈리아제 언살도가 있었다. 기옥은 여기에서 총 1천5백여 시간의 비행기록을 가졌다고 한다.
지난 2016년 국가기록원은 운남 비행학교에서 발행한 기옥의 졸업장인 ‘필업증서’와 중국 공군이 발령한 상위 관찰서 위임장인 ‘민국정부 군정부 위임장’을 복원했다고 하였다. 1926년 5월 동아일보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린다. “중국 창공에 조선의 붕익(붕새의 날개). 중국의 하늘을 정복하는 조선 용사 그중에서 꽃 같은 여류 용사도 있어. 여류 비행가 권기옥 등 국민군에서 활약.”이다.
상해로 돌아온 기옥은 한동안 진로를 고심하다가 1926년 4월 펑위샹(馮玉祥) 군벌 휘하의 서북군, 장지강(張之江) 장군이 사령관으로 있는 항공처의 부조종사로 들어간다. 중국 군벌은 청나라가 멸망한 1912년 군사력을 기반으로 전국 또는 지방에 웅거 하면서 실질적으로 권력을 행사한 중국의 고급 군인과 그 병력을 말한다. 북양군벌의 원세개, 만주를 기반으로 한 장쭤린과 그의 아들 장학량, 서북지역을 지배한 펑위샹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 해 국민군의 항공대가 발족하자 기옥은 항공대 소령으로 임관하여 창설 멤버로 활약하였다. 기옥은 주로 중국 군관들에게 영어, 일본어 교습, 일본인 식별을 교육하는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기옥은 훗날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중일전쟁 때 상해 상공에서 폭격 비행도 했지만, 나의 소망이었던 조선총독부 폭격은 끝내 못해 본 것이 한이오.”(서울경제신문 1979. 8. 29)라고 했다.
해방 후 1947년 귀국한 기옥은 국회 외무위와 국방위 전문위원으로 활동하며 대한민국 공군 창설에 기여하여 ‘공군의 어머니’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기옥의 남편은 독립운동가 이상정이다. 이상정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의 의원이며, 이상정의 동생은 이상화이다. 이상화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우리가 잘 아는 저항시인이다.
1920년대 대한민국은 조선이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긴 후 조선의 땅에 조선사람은 있었으되 정부가 없어 국제 사회에서 국가로 인정받지 못한 암울한 시기였다. 그래서 ‘대한민국 정부’가 아닌 ‘대한민국 임시정부’였다. 그 시기에는 세계열강들이 작고 힘없는 나라를 자신들의 식민지로 만들어 민족 차별과 경제 수탈의 만행을 자행하던 시기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하여 독립지사들은 일본과 상대했던 미국, 러시아, 중국의 힘을 얻어 독립을 시도하였으나 힘이 미약했다. 힘은 미약했지만, 우리의 힘으로 광복의 한 부분을 담당했던 것은 분명하다. 어린 여성 기옥도 조선인은 있으되 조선이 없고 대한인이 있으되 대한민국이 없었던 시대의 역경을 극복하기 위해 개인의 영달을 버리고 학생 때부터 독립운동에 가담했고 성년이 되어서는 군인이 되어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의지로 반평생을 보냈다. 그의 소망처럼 우리를 지배했던 조선총독부 상공에 폭탄을 떨어트리는 기회를 만들지는 못했지만, 그의 일생은 독립투쟁 하나만을 위해 살아왔다고 본다. 기옥의 유품과 사진, 그리고 생각과 행동은 서울 대방동 숭의여고 역사관에 전시되어 있고, 기옥의 전신 크기의 비행 사진과 어록은 충북 청원에 있는 공군사관학교 역사관에 전시되어 있다.
지금 대한민국에는 권기옥의 후예들이 파랗고 드넓은 조국의 하늘을 당당히 지키고 있다. 앞서 말한 대로 공군사관학교는 1920년대 중국 공군보다 훨씬 뒤늦게 70여 년이 지난 다음 1997년 여성에게 문호를 개방하였다. 2002년 대한민국 공군 최초의 여군 전투조종사가 탄생했다. 사관학교 입교에서부터 고등비행훈련과정 수료식까지 5년을 남성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게 생도생활과 비행훈련을 버티고 견뎌야만 조종사의 상징 ‘빨간 머플러’를 목에 두를 수 있다. 그리고 2007년 전투기 4대로 구성된 1개 편대를 지휘하는 편대장에 여군 조종사가 임명됐고, 2015년에는 대대장보다는 한 급 아래이면서 주로 소령 계급인 비행대장이 등장했으니 이제 중령 계급으로 4개 편대를 지휘하는 전투비행대대장이 공군 최초로 활약할 날도 멀지 않았으리.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