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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공의 전설 김영환 장군

- 공군 아저씨가 들려주는 공군 역사인물 이야기 김영환 장군 편 2.

by 이형걸

멋쟁이 김영환 장군은 겉모습만 그런 것은 아니야. 그가 보유한 공군 최초 타이틀은 많아. 아까 말한 빨간 마후라를 처음 착용하신 분이지. 대한민국 공군은 1949년 10월 1일 창군되었어. 우리나라 공군 중 장교 1호는 김영환이야. 그리고 우리 공군이 창군된 지 1년도 되지 않아 1950년에 6·25 전쟁이 발발한 거야. 안타깝게도 아직 날지도 못하는 둥지 속 새끼 독수리가 북한군을 맞이해야만 했어.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우리 공군은 전투기가 1대도 없었다는 거야. 이게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사실이야. 마치 보초는 있는데 총이 없는 셈이었다고 할까. 단지 L-4, L-5라는 연락기만 있었단다. 유엔군은 서둘러 한국 공군에 전투기를 지원하기로 결정했어. 그때 유엔군 극동군사령관은 그 유명한 맥아더 장군이었지. 김영환 장군은 일본에 주둔하고 있는 유엔군 극동사령부에서 F-51 무스탕 전투기를 처음 몰고 온 조종사 열 명중의 한 명이지. 북한군이 남쪽으로 밀고 내려오는 속도가 너무 빨라 새로운 전투기에 대한 적응훈련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1주일 만에 돌아왔어. 전투기는 연락기보다 속도가 더 빠르고 기총과 포탄을 달고 있어서 계기도 매우 복잡해. 비행기 무게가 더 무겁고. 전투기 적응훈련을 하려면 한 달 정도 시간이 필요한데 그렇지만 너무 상황이 급박한 거야. 그래서 1주일 만에 돌아온 거야. 그때가 7월 2일이고 한국 공군이 첫 출격한 날은 바로 다음날 7월 3일이야. 동해안의 묵호, 삼척지구에서 남하하는 적 탱크에 포탄을 투하했지. 6·25 전쟁에서 공군의 활약상은 다음 편에서 다루기로 하고.

김영환 장군이 용맹한 전투조종사이기만 했다면 전설이라고 할 수 없을 거야. 당시 전쟁에서 용맹한 군인은 참 많았어. 하지만 김영환 장군처럼 우리가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 삼천리 금수강산, 그뿐만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조종사는 쉽게 찾기 어려울 거야. 전쟁이 일어난 지 1년이 지난 1951년 여름. 탱크를 앞세우고 남쪽으로 물밀 듯이 내려온 북한군도, 그러나 인천 상륙작전으로 전세를 뒤집고 압록강까지 올라간 국군과 유엔군도, 그리고 뒤늦게 참전한 중공군도 1년이 지나자 힘이 빠지고 전선은 38선 근처에서 교착상태에 빠진 거야. 한쪽에서는 휴전 회담이 거론되고 있으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여전히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어. 38선 남쪽은 전쟁 이전 상태로 완전히 회복되었지. 그런데 남쪽에는 북쪽으로 도망가지 못한 패잔병 약 9천여 명이 있었고 그중 지리산을 거점으로 약 4천여 명이 빨치산으로 활동하고 있었어. 이들은 고립되었기 때문에 북한으로부터 군수물자를 보급받을 수 없어 스스로 해결해야만 했기에, 낮에는 숨어있다 밤에 민가에 내려와 약탈하기도 했어. 그리고 경찰서나 작은 군부대를 기습하고 작전을 방해하는 유격전을 펼치는 것이 그들의 임무래. 이들에 의한 피해가 만만히 않아서 경찰은 대대적인 공비토벌작전을 전개하기로 했어. 지리산 빨치산에 관한 영화는 1990년 영화 ‘남부군’에서 그들의 생활을 잘 보여주고 있어.

그 해 7월 지리산지구 경찰전투부대는 공비토벌작전을 위해 공군에 항공 지원 요청을 했어. 공비토벌작전의 공군 측 책임자는 김영환 장군이었지. 당시 직책과 계급은 공군 전투비행단 참모장이었고 대령이었지. 8월 김영환 대령이 지휘하는 4대의 F-51D 편대는 지리산 응석봉에서 암약하는 공비들을 지상 공격하는 것이 첫 번째 임무수행이었어. 그러던 중 한 번은 해인사에 1개 대대 규모의 공비가 숨어있다는 정보가 있으니 기지로 복귀 중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어. 김영환 대령은 출격하기 전 편대원들에게 폭탄과 로켓탄은 사용하지 말고 기총만으로 사찰 주변을 공격하라고 구체적인 공격 명령을 하달했어. 공비가 있다면 폭탄을 쏟아부어 집중 공격을 해야 하는데 기총만으로 소극적 공격을 하라니 왜 그랬을까? 그것은 해인사에 팔만대장경이 있었기 때문이야. 팔만대장경은 몽골이 고려를 침략해 왔을 때 임금과 신하들이 강화도로 수도를 옮겨가면서, 부처님의 힘으로 몽골의 침입을 막고자 하는 소망을 담아 온 나라가 힘을 모아 1236년부터 장장 16년에 걸쳐 만든 것이지. 8만여 장의 목판으로 만들어서 팔만대장경이라 불리는데 정확히도 8만 1천215장의 대장경 판이지. 나무판의 앞, 뒤에 글자를 새겼으므로 실은 16만여 장에 이르는 엄청난 글자를 새긴 셈이지. 고려시대 사람들 대단하지 않아? 원래는 강화도 선원사에 있다가 조선 태조 때 합천 해인사로 옮겼다고 하지. 전쟁이 일어나면 얼마나 많은 백성이 죽어나가고 논밭은 다 뭉개지고 사회는 혼란스럽고 경제는 엉망진창이 되어 나라는 피폐해지고 말지. 이겼다고 해도 온 강산이 무너지고 난 다음 복구하는데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어. 그래서 전쟁은 예방이 가장 중요해. 그래서 나라를 지키는 장군과 군대는 있지만, 부처님의 보살핌까지 필요했던 거야.

김영환 장군은 그것을 본 거야. 부처님의 보살핌이 6·25 전쟁 와중에서 나라와 국민을 위해 그대로 보존되어야 한다고 말이야. 그래서 혹시나 팔만대장경이 훼손될까 봐 해인사 주변에 기총사격만 하라고 했다 하더군. 그 역시 군인이었기 때문에 상부의 작전명령을 거부할 때는 갈등하였을 거야.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있는 거잖아. 때로는 본인에게 처벌이 내려질 수도 있지. 하지만 그가 처벌을 감수하고 선택한 더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김영환 장군에게 사람들은 “왜 공비를 공격하지 않았냐?”라고 비난하였어. 그러자 그는 “사찰이 국가보다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공비보다는 중요하다. 지금 공비를 얼마 소탕했다고 전쟁이 판가름 나지 않는다. 해인사에는 700여 년을 내려온 민족의 문화재가 있다.”라고 말했다고 하더군. 팔만대장경은 그에게 호국의 문화재였던 거야.

임진년 일본의 침략에도 병자년 청나라의 침략에도 그리고 일제강점기에도 용케 살아있었는데 하마터면 6·25 전쟁에서 불타 사라질 뻔했지. 그 후 팔만대장경은 국보 52호로 지정되었고,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동록 되었어. 그 가치가 더욱 높아진 거지. 전쟁이란 포연 속에서 모든 것이 사그라지는데 김영환 장군의 분별력이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지키는 보호막이 된 거야. 해인사는 그의 뜻을 기려 공적비를 세우고 해마다 8월이면 ‘김영환 장군 호국 추모제’를 열고 있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는 독일이 파리를 공격하려고 할 때 선조들의 유산이 가득한 파리를 보존하기 위해 항복을 했다는 말도 있어. 그렇다고 프랑스가 패전국이 된 것은 아니잖아. 김영환 장군도 그것을 알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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