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마을 아카이브

기록, 공동체 그리고 나의 자리

by 학이지지



이 책에 신영복 선생님의 “여럿이 함께”, “여럿이 함께 가면 길은 뒤에 생긴다”는 말씀이 나온다. 하지만 “여럿이 함께 가면 험한 길도 즐겁다”는 말에는 선뜻 공감하기 어렵다. 물론 힘이 되기는 하겠지만. 공동체 재생이나 주민들과 협치·협업을 하며 느낀 것은, 여럿이 함께할 때 즐거움이 생기는 순간은 오히려 험한 길을 함께할 때뿐이라는 것이다. 아메바가 환경이 나빠지면 뭉쳤다가 좋아지면 흩어진다지 않나. 사람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전쟁이나 어두운 밤길은 여럿이 함께해야 안심되지만, 순례자의 길은 혼자 걷는 편이 좋다. 나는 혼자 책을 읽고 혼자 노는 시간을 좋아한다.

‘험한 길도 즐겁다’는 말은, 어쩌면 신영복 선생님이 세상이 본래 험하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어쨌든 거버넌스는 여럿이 함께하는 일이고,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조율하는 과정이다. 도시재생에서 이런 조율은 특히 어렵다. 지주의 의견과 세입자의 의견은 애초에 충돌할 수밖에 없다.

요즘 나는 인류애가 사라졌다가도 다시 피어오르고, 사람들과 얽히기 싫은 마음이 번갈아 들곤 한다. 지하철 타기도 싫고, 회사생활을 10년 넘게 어떻게 버텼나 싶다. 회사를 그만두니 스트레스에 대한 내성이 낮아진 건지, 별일 아닌 것에는 무덤덤하다가도 사소한 일에 짜증이 치민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내가 속한 집단도 공동체나 본질에 정말 관심이 있는가 의문이 든다. 나 역시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래서 다시 “여럿이 함께”라는 말을 곱씹는다. 그 과정 속에서 내 생각도 한 바퀴를 돌며 조금씩 나선형으로 성장하고 있다.

이 책을 꽤 오랫동안 붙잡고 있다. 읽다가 속으로 욕을 퍼붓다가도 다시 책을 집어드는 내 모습이 우스울 정도다. 어떤 강연자는 “평화는 좋아하고 사람도 좋아하지만 사회생활은 싫어서 밥은 무조건 혼자 먹는다”고 말했다. 그 말이 얼마나 공감되던지 웃음이 나왔다. 지하철만 타도 기가 빠져나가는 것 같은 나를 그대로 대변하는 듯했다. 내가 이렇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건 가진 게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문득 생각한다. 60이 넘어 글을 쓰는 조금은 괴짜 같은 할머니가 된다면, 혼자 밥을 먹어도 편안한 날이 올까. 책 모임 ‘책사넷’에서 나눈 대화 중 한마디가 오래 남았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가 아니라, 다정한 것이 살아남아야 한다.”그렇기에 우리는 다정함이 반드시 살아남을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남겨야 한다. 사람 중심의 사회에서 사람답게 살아가는 이야기, 그리고 부끄럽지 않게 이어지는 삶의 이야기를 기록해야 한다. 그것이 내가 기록하고 싶은 이유다.

아카이빙이라는 말 속에는 기억을 찾아내고 기록하는 모든 활동이 포함되어 있다. 이미 존재하는 기록을 찾아내고, 없는 기록은 발굴해 적어야 한다. 나는 이기적인 세상 속에서 조금은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마음 편하게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남기고 싶다. 사회생활에서 받은 스트레스나 허탈함을 낭비하는 대신, 공동체를 통해 건강하게 풀어내야 한다. 내가 바라는 건 단순한 자기 합리화가 아니다. 자신의 언어로 자기 치유를 넘어, 자기 객관화에 이르는 기록이다. 우리의 삶은 계속되고, 기록해야 할 대상 또한 끊임없이 생겨난다. 갈등도 다양해지고, 이를 해결하는 방식 역시 더 다양해지고 있다. 중요한 건 싫다고 바로 손절하는 것이 아니라, 갈등을 어떻게 풀어냈는지 그 과정을 기록하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 사람답게 사는 길이다.

이 책을 읽으며 사회사업가로서의 내 정체성이 한층 뚜렷해졌고, 기록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달았다. 특히 첫 장에 담긴 이영남 교수님의 말씀이 오래 남는다. 멀리서 뵈었지만 교수님의 인상은 따뜻했고, 글에서 전해지는 솔직함과 기록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은 깊었다.

내 위치는 어디일까? 쉬는 동안 기자 아카데미도 다녀보고, 여러 길을 기웃거렸지만 결국 다시 내가 하던 일과 비슷한 지점으로 돌아왔다. 마치 나선형으로 원을 그리며 조금씩 중심에 가까워지듯, 내 자리와 방향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한 번 돌 때마다 시야가 넓어지고, 이전보다 더 단단해진다. 사람과 얽히기 싫어도, 결국 사람이기에 느끼는 짠함이 있다.

『누구나 마을 아카이브』는 마을 기록인 양성을 위해 진행된 마을 기록 학교 강의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책으로, “기록은 단순히 과거를 보존하는 수단이 아니라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데 필요한 문화적 유전자”임을 강조한다. 기록은 공동체의 기억을 만들고 전승하며, 이웃과 나누며 결속을 강화하는 문화적 토대가 된다.

책은 '마을 아카이브의 필요성과 기록의 의미’, ‘마을 아카이브 구축을 위한 민관 협력과 지속성의 조건’, ‘국내 공동체 현실과 아카이브의 의미’, ‘실제 사례로 본 아카이브의 지역사회 기여와 재활용 방안’, ‘골목 잡지 사이다와 주민 주체의 아카이브 참여’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 특히 마을 기록은 개발과 변화 속에서 훼손되는 지역성과 생활 문화를 지키고, 지역 정체성을 후손에게 전하는 중요한 수단임을 보여준다. 협동조합, 마을 문화 기록, 골목 잡지 제작 등 다양한 실천 사례는 마을 기록이 삶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잘 설명한다.

이 책은 마을 아카이브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 민관 협업이 필수적임을 강조한다. 영국 국가기록원이 공동체 아카이브를 포상하고 전문 아키비스트를 연결하는 활동(1단계), 지방정부 차원의 공동체 아카이브 네트워크 유지(2단계), 박물관·도서관·아카이브·박물관 협회 등과의 파트너십 구축(3단계) 등이 그 예시다. 마을 아카이브는 소장품 중심이 아니라 풀뿌리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주민 간 소통과 합의를 바탕으로 해야 하며, 이를 추진하는 사람과 인프라가 핵심 요소다.

국내 현실을 보면, 1990년대 이후 관 주도로 시작된 마을 만들기는 거버넌스 체계의 부재와 부족한 소통으로 자생력이 약화되었다. 책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주민들이 스스로 기록 활동에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예를 들어 수원 갈비가 유명해진 배경에도 정조의 화성 육성과 둔전 경영이라는 역사적 맥락이 있으며, 이러한 기록이 지역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책은 지역사회에 기여하고 재활용되는 아카이브의 다양한 사례를 제시한다. 수원 우시장과 세운상가 재생사업에서 아카이브는 지역 역사와 맥락을 복원하고 도시재생의 핵심 동력이 되었다. 세운상가의 과거—상가와 아파트의 공존, 교회와 어린이놀이터 같은 생활 시설—가 아카이브 덕분에 생생히 드러났다. 구술 자료는 개인의 기억을 넘어 공동체의 욕망, 믿음, 역사적 상황을 드러내며, 슬픔과 아픔까지 기록하는 역할을 한다. 원본 기록은 소책자, 교육 교재 등 다양한 콘텐츠로 재활용되며, 라키비움(라이브러리+아카이브+뮤지엄) 같은 복합 기록문화 플랫폼의 필요성도 강조된다.

골목 잡지 ‘사이다’ 사례는 주민 참여형 아카이브의 좋은 모델이다. ‘사이다’는 지역 사람들의 기억과 관계를 기록하고, 서울 중심의 문화 대신 외면되거나 소외된 지역의 진솔한 삶을 전한다. 주민들이 기록의 대상이 아닌 주체가 되어 직접 참여한다는 점을 책은 특히 강조한다.

결국 『누구나 마을 아카이브』는 기록을 공동체적 기억과 문화적 유전자로 재해석하며, 민관 협업과 주민의 주체성을 기반으로 지속 가능한 마을 아카이브 구축의 길을 제시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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