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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학이지지 Nov 12. 2021

귀성길

오래 전, 고향에 내려가는 추석 기차표를 구하지 못해 무작정 고속터미널로 갔다. 그러나 버스표는 없었다. 그런데 마침 저 멀리서 ‘대전, 대구 ……’ 각 도시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한 아저씨가 내게 어디 가냐 물었다. 버스가 있으니 자신을 따라오라고 했고 나처럼 표를 구하지 못한 몇몇 사람들도 함께 뒤를 따랐다. 반신반의하던 사람들로 버스 좌석이 꽉 차니, 그제서야 아저씨는 현금으로 차비를 걷고는 경유하는 모든 도시를 읊었다. 그 차는 모든 주요 도시에 정차하는 버스였다. 전화기 배터리는 얼마 남지 않았고, 버스를 탔다는 문자만을 가족에게 남긴 채 전원을 껐다. 온 몸에 한기가 들었고, 왠지 그 버스가 갑작스럽게 다른 곳으로 사라질 것 같은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언제쯤 도착할지 모르는 그 버스를 탑승한 시각은 밤 10시였다.


옆 자리에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장발의 남자가 술 냄새를 잔뜩 풍기며 딸꾹질을 하고 있었다. 속으로 제발 나에게 토를 하지 말라는 기도를 하며, 얼른 자리가 생기면 이동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 속마음을 읽었는지 그는 내게 술 냄새가 많이 나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대전까지 도착하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선잠을 자는 것 같은데 나도 모르게 헤드뱅잉을 하고 있었다. 해가 뜨는 것 같은데 언제 도착할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그렇게 긴긴 밤을 버스 안에서 보냈다. 기다림에 지쳐 피곤했는지 눈을 떠보니 그 남자의 어깨에 기대어 자고 있었다. 내 무릎에는 그 남자의 자켓이 덮여있었고 의문스런 상황에 나는 얼른 죄송하다며 자리를 옮기겠다고 했다. 남자는 괜찮다고 했고, 필요하다면 자신의 자켓을 계속 덮어도 된다고 했다. 꽤 쌀쌀했기에 그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해가 뜨고 있었다. 그는 나와 같은 곳에 내렸고, 서로 인사도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각자의 길을 갔다. 오전 7시였다. 우연한 만남은 짧지만 강렬했다. 가보지 않은 길이라서 더 생각이 나는 걸까.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항상 따뜻한 정이 자라나는 건 아니다. 어떤 사람은 내게 따뜻함, 행복함, 깨달음을 주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내 존재를 부정하고 싶을 만큼 깊은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오늘도 내일도 사람을 만난다. 그 때의 그 남자처럼 스쳐가는 사람도 있겠지만, 우연한 만남이 어느새 내 일상이 되어버린 사람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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