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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학이지지 Apr 17. 2023

[남미] 지구 반대편으로 도피 2

효도여행 아니고 육아여행인데요

  질병으로 인해 그나마 남아있던 여유 돈이 사라지고 퇴사까지 한 시점에서 궁지에 몰린 나를 꺼내준 건 역시 가족이었다. 언젠가부터 허전함과 불안함, 우울, 무기력이 나를 뒤덮쳤고 엄마는 제발 숨만 잘 쉬어달라고 부탁했다. 햇살을 즐기는 법을 잊어버렸다. 엄마가 남미를 가자고 했을 때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단 생각을 했다. 가야만 했다.


  엄마 또한 서로의 부담을 덜기 위해 자유여행이 아닌 세미배낭을 추천했다. 숙소, 비행기 티켓, 국가 간 이동은 인솔자가 있어 한결 수월했다. 각각 자유일정은 준비하면 되니, 부담이 덜했다. 도서관에서 남미 여행 책을 열심히 빌렸다. 다 읽지 못해도 필요한 부분은 메모하고 열심히 구글 지도 앱에 가고 싶은 곳을 표시했다. 한 달 간 남미 관련 책만 빌리니, 사서가 자연스레 물었다. “남미 여행 가세요? 혼자 가시는 거예요?” 엄마랑 간다는 말에 엄마랑 많이 친하냐는 질문이 뒤따랐다. 이전에 엄마의 지인이 동일한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엄마는 “적당히요”라고 대답했다. 나도 똑같이 말했다. “적당히요.” 생각해보면 이만큼 정확한 말도 없는 것 같았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이 있지만, 떨어져 살아도 나는 안 좋은 소식을 자주 전한다. 서른이 넘어서도 여전한 잔병치레를 곧이곧대로 전한다. ‘팔목이 아프다, 귀가 아프다, 요즘 화장실을 더 못 간다, 술병이 났다, 고양이 밥을 주다가 계단에서 굴렀다.’ 등등 해가 갈수록 아픈 이유도 가지각색이다. 나도 모르겠다. 엄마한테 왜 아직까지 어리광을 부리고 있는지...


  예측불허의 땅 남미에서 엄마의 관계가 더욱 걱정됐다. 이미 많은 실망을 안겼지만, 눈으로 보는 것과 귀로 들은 것은 분명히 다를 것이었다. 엄마가 내 모습을 보고 격 받지 않길 바랬다. 출국이 다가올수록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날이 많았다. 숨을 가다듬고 잠을 자려고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예상대로 엄마와 나는 자주 다퉜고, 어지럼증에 고생하며 여러 번 쓰러지는 나를 보며 엄마는 많이 울었다. “내가 네한테 너무 무관심했나? 내가 그렇게 네한테 해준 게 그리 없나? 와 이리 됐노?” 엄마의 말에 억장이 무너졌다. 엄마는 살면서 내게 뭘 재촉한 게 없었다. 그저 아프지 말고 건강하라고만 했다. 그럼에도 나는 혼자 쫓기고 바빴고, 결국 이도 저도 아닌 삶을 살고 있다. 엄마의 눈물에 어떻게 대처할지 몰라 사춘기 초등학생처럼 톡 쏘아붙였다. “엄마 없이 못 살아도 엄마와 같이 못 산다는 말이 엄마한테도 똑같다니까. 딸 없이 못 살아도 딸이랑 같이 못사는 건 엄마가 마찬가지라고! 내 알아서 할 수 있다고! 나 서른 넘었다고!” 일행 중 다른 두 모녀와 비교되는 상황이 너무 싫었다. 나와 비슷한 연령대인 딸들은 각자 엄마를 챙기느라 바빴지만 우리 엄마는 나를 챙기느라 정신없었다. 밤새 끙끙대며 하루에 몇 봉지의 약을 뜯는 나를 보며 애써 괜찮은 척 하는 엄마에게 더욱 모진 말을 내뱉는 나쁜 딸이었다. 자책하며 눈치도 많이 봤다. 모녀여행이라 하면 많은 이들은 엄마를 부러워하겠지만, 오히려 반대였다. 효도여행이 아니라 육아여행이었다.

  여행 일주일 만에 지친 엄마는 열한시 반에 휴대폰을 하지 않겠다는 딸의 다짐을 받아냈고, 평소 하지 않는 잠꼬대로 역공격을 했다. “잠 좀 자라! 제발 좀! 너는 어쩜 네 아빠랑 똑같노!” 자다가 갑작스런 엄마의 외침에 오히려 잠 못 자는 날도 많았다. 아빠도 자주 밤마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려 엄마를 힘들게 하는 걸 알고 있기에 아빠가 들어야 할 혼남까지 내가 듣는 것 같아 억울했다. 유치원생처럼 닭똥 같은 눈물을 오랜만에 흘렸다. 전형적인 효도여행은 아니었다. 지구 반대편에 버려도 알아서 집에 찾아갈 수 있는 나이지만 열쇠고리처럼 엄마 옆에 잘 붙어 다니려고 애썼다. 엄마와 단 한 번일지도 모를 여행에 집중하고 싶었다. 시간이 허락한 여행이었으니까.


 둘이 떠난 여행이었지만 우리 가족을 이해하는 시간이었다. 네 명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상대로 엄마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엄마 또한 이미 커버린 나를 이해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서로 다른 모습에 적잖이 놀랐다. 그러면서도 항상 알차게 보내야 한다는 강박이 있으면서도 게으른 나를 엄마는 이해해주었다. 항상 엄마가 내게 쏟은 노력만큼 자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컸다. 여러 번 엄마의 뒤통수를 쳤고 상처를 줬기에 엄마가 나를 심각하게 부끄러워할 것이라 생각했다. 엄마의 체면을 자주 깎았고, 자주 아프고, 아쉬운 소리하는 딸이라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엄마는 “나는 흥이 많이 없잖아. 근데 너희 둘은 아빠를 닮아서 흥이 많아서 좋아. 내가 흥이 없으니까 인생을 즐기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싶었어. 그래서 피아노도 보내고 플롯도 시키고 미술관도 같이 가고 그림 수업도 보낸 거잖아. 그리고 너는 호불호가 강해. 네가 원하는 걸 알려고 이것저것 경험해보잖아. 내가 바라던 대로 너는 자라주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어.”라고 말해주었다. “네가 언제든 아프다고 말할 수 있는 부모가 될 수 있어서 다행이야.”라고 덧붙였다. 외로울 때, 쓸쓸할 때, 화가 날 때 여전히 엄마가 나를 뒤에서 받쳐주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받아왔던 사랑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새로운 사랑이 가득 하늘을 가득 메웠다. 소중함 사람과 매일 낯선 곳에서 발견하는 새로움이 기적 같은 선물임을 알았다. 남미로 도망갈 기회를 준 엄마는 어떻게 지금을 살아야하는지, 어떻게 내려놓아야 하는지 끊임없이 이야기해주었다. 내가 살아있음이 누군가에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도 알게 됐다. 남미에서 엄마와 함께 맞은 내 생일은 그래서 더욱 특별했고, 앞으로 더 잘 살아내야겠다는 다짐도 함께 할 수 있었다. 내 자신을 부정하고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던 과거가 더 부끄러워졌다. 내가 나를 모르기에 더욱 불안했고 자꾸 나를 찾아다녔다. 몰라야할 것들은 너무 많이 알았고 알아야 할 것들은 너무 몰랐다. 나를 사랑하는 시간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엄마와의 유대도 깊어진 것 같았지만 나와의 유대감이 더 깊어진 여행이었다. 무엇보다 두려움을 딛고 엄마와 함께 떠난 나를 칭찬했다.

 엄마의 육아는 언제쯤 끝이 날까. 다른 사람들이 바라는 내가 아닌 진짜 나로 살아가고 싶어 방황하는 나를 그만 보여주고 싶다. 너무 천천히 어른이 되어가는 나를 엄마가 좀 더 기다려준다면 다음에는 꼭 육아여행이 아닌 효도여행으로 가고 싶다. 영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의 해원처럼 꿈과 현실이 흐릿할 때도 많지만, 그 때 쯤은 꿈속에서처럼 내가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하고 행동하고 싶은 대로 당당히 행동할 수 있는 멋진 어른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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