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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학이지지 May 16. 2023

[남미] 지구 반대편으로 도피3 - 불안의 무게

1. 여행 전부터 이미 마음은 그곳에 가있었다. 주변에 남미로 떠나겠다 알리고 다녔다. 그렇지 않음 떠나지 못할 것 같았다. 퇴사 직후 부랴부랴 준비하기 시작했다. 빡빡한 일상 속에 틈틈이 여행을 즐기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몸과 마음이 굳어져 움직이는 게 힘들었다. 낯선 곳에서 말랑한 젤리가 되고 싶었다. 창 밖으로 지나는 모든 장면을 담고 싶었다. 좀 더 다른 세상을 마주하고 싶었다.


2. 평소 불안이 많아 가방에 이것저것 넣어다닌다. 때문에 보부상 스타일의 가방이 필수다. 엄마는 짐이 가벼워야 오래 다닐 수 있음을 거듭 강조했다. 매우 오랜만에 긴 여행을 떠나기에 며칠 고민했다. 기내용 캐리어에 필요할 만한 것들을 가득 쌓아두었다. 필요한 것들을 채우는 것보다 없어도 되는 것들을 비우는 게 일이었다. 인생의 짐만으로 무거워 힘겨운데 어깨에 이는 짐까지 무겁다면 너무 괴로울 것 같았다. 남미는 짐 버리기부터 가르쳤다. "짐을 비워낸 자리, 행복을 채워오리라." 내가 짐이 가벼워야 엄마의 짐을 들어줄 수 있으니, 신중히 가져가야겠다 다짐했다.


3. 한달 간 짐은 내 모든 것이었다. 집이었다. 기내용 캐리어와 백팩에 사계절 옷 (등산바지, 긴바지 레깅스, 등산 아노락 후디, 바람막이, 후리스, 경량패딩, 긴팔스포츠티셔츠 2개, 반팔스포츠 티셔츠 1개, 간절기용 셔츠, 내복, 탱고쇼 관람용 원피스), 속옷(브래지어 3개, 등산양말 2개, 팬티 5개, 긴양말 2개, 덧버선 2개) 접이식 포트, 소형 드라이기, 마스크팩, 마스크, 화장품, 의약품, 슬리퍼, 손핫팩 4개, 방석핫팩 4개, 월경대, 선글라스, 스포츠타월, 파스, 휴족시간, 각종 자물쇠, 옷핀, 빨래줄, 미역국 블럭 4개, 텀블러, 전자책리더기, 가루세제, 멀티어댑터, 클렌징티슈, 목베개, 안대, 귀마개, 휴대폰 방수, 우산을 챙겼다. 이 안에 비타민 한 통을 비롯한 각종 약도 다 넣었다. 다행히 소모품이 많아 여행 내내 짐은 줄었다. 아쉽게도 접이식 플랫 구두를 챙겨가지 못해 나중에 엄청 후회했다. 예비용 보스턴백, 배낭, 휴대용 가방, 장바구니도 챙겼고 샴푸 대신 비누를 가져갔다. 미리 로밍도 하고 30일이 넘어가니 유심도 추가로 샀다. 휴대용 캐리어 저울로 무게를 보니 12kg 정도되었다. 이 정도면 성공인 듯했다.


4. 세미배낭으로 여행을 떠났기에 동행자들이 있었다. 공항에서 그들의 가방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엄청난 크기의 캐리어들이 줄을 서 있었다. 저 캐리어 안에는 무엇이 들었는지 궁금했다. 결과적으로 짐이 적은 사람이 최고다. 남미 국가의 택시는 트렁크가 매우 작았다. 덕분에 우리 모녀는 택시에 금방금방 짐을 실을 수 있었다. 다시 여행을 간다면 좀 더 줄여서 갈 수 있을 것 같다. 많은 물건이 없어도 그럭저럭 살만 했다.


5. 여행 가방은 내 불안의 무게였다. 엄마 덕분에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었다. 여행의 목적은 잠시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환경에서 생존의 욕구에 집중하며 그동안 잊고 있었던 나를 되찾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가벼워야했다. 떠나기 이틀 전 심장이 매우 쿵쾅거렸다. 잘 다닐 수 있을지, 엄마와 싸우지는 않을지, 쓰러지진 않을지 걱정이 많았다. 나는 스트레스로 인해 이미 폭발했고 다시 또 부풀어 올라 터지기 직전이었다.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비슷한 생각만 되풀이했다. 머릿 속이 엉망진창이었다. 너무 무서웠다. 갑자기 왜 겁이 나는 건지 이해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떠나는 것만이 답이었다. 좀 더 근본적인 불안을 없애기 위해서는 다른 세상으로 나가야만 했다. 여행을 다녀온 지금도 여전히 불안하다. 하지만 분명 당시 느꼈던 불안의 무게는 이전보다 줄었다. 또다른 불안이 그 자리를 대체했을 뿐이다.


6. 엄마에게 괜찮은 척했지만, 하루에 몇 봉지씩 먹어야 하는 약이 나를 이상한 이미지로 엄마에게 인식시켰다. 가방 1/4이 약이었기에 엄마도 황당했을 테다. 엄마한테 관심 끌려고 먹는 약이 아니었다. 정말 괜찮아지려고 먹는 약이었다. 어차피 금방 들통 날 것 같았다. 그래서 아프다고 했다. 다른 효녀들처럼 괜찮은 척, 잘 지내는 척 연기도 안되었다. 고통을 자꾸만 숨기려 하면 할수록 마음이 더 무거워지고 표정이 더 안 좋아졌다. 엄마에게 말했다. 나는 불안해도 자꾸 괜찮아지려고 이것저것 시도하고 있으니, 남들보다 더 잘 지내고 있는 거라고. 각자 들 수 있는 무게는 다르니, 조금씩 나아지면 분명 더한 무게도 견딜 수 있을 거라고. 엄마 덕분에 불안해도 나는 돌아갈 곳이 있었다. 바로 옆에 엄마가 있으니 이상하게 내가 정말 어디서부터 만들어졌고 존재했는지 알 것 같았고, 거기서부터 편안함을 느꼈다. 나의 존재 자체가 불안한 적이 많았다. 하지만 그 불안은 조금씩 줄어들었다. 이미 나는 존재했다. 그리고 존재하고 있다. 그 증거가 내 옆에 있었고 나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이유들을 조금씩 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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