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에 돌아왔는데 벌써 5월 말이다. 생각보다 이 작업이 쉽지는 않다. 그래도 힘이 들거나 마음이 공허할 때 그 때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힘이 생긴다.
1. 월요일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점심쯤 출발하는 비행기. 설레는 마음으로 대한항공을 탔다. 메니에르병으로 고생하고 있어서 귀가 아플까봐 두려웠다. 혹시 몰라 비상약을 하나 먹고, 귀마개에 헤드폰까지 준비했다. 다행히 아프지 않았다. 엄마의 걱정을 조금 덜었다. 그렇게 열 몇시간을 날았다. 영화도 보고 음악도 들으면서. 앞자리 사람이 좌석을 너무 뒤로 젖혀서 "Could you pull your seat forward a bit?"을 겨우 말하고 다시 잠에 든 것 빼곤 순조로운 비행이었다.
2. 비행기 안에서 본 영화
안나 카레니나, 2013, 감독 : 조라이트, 주연 : 키이라 나이틀리, 주드 로, 에런 존슨
안나 카레니나를 수없이 봤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곱씹고 곱씹었다. 사실 소설이 더 좋았다. 짧은 시간의 영화에 소설 속 명대사들을 다 읊을 수 없었다. 안나를 유혹하는 브론스키, 톨스토이 이로 여겨지는 레빈. 오직 사랑만을 위해 모든 걸 던지는 안나와 운명을 믿고 현실을 헤쳐나가는 레빈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생각하며 봤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라는 소설 속 첫 문장을 떠올리며, 여행을 떠나는 그 순간 안나가 아닌 레빈으로 돌아오고 싶었다. 좀 더 안정된 모습으로 건강하게 돌아오자고 다짐했다. 사랑 없이 불행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외로움으로 지쳐 쓰러진 사람들도 여럿 봐왔다. 소설 속 안나는 말했다. "이제 자는 진짜고 온전해요."라고. 여행에서 나의 진정한 모습을 찾고 싶었다. 정말 중요한 게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샬롯, 2021, 애니메이션,
독일계 유대인 예술가 샬롯 살로몬의 이야기다. "삶이 우리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삶을 사랑하는 거지. 나에겐 시간이 없어."라고 샬롯은 말한다. 영화는 비극적이었고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보는 내내 불안했다. 나치를 피해 외할아버지의 집으로 간 샬롯은 엄마와 이모의 자살을 알게 되었고, 자식들의 사망으로 괴로워하던 할머니마저 자살로 생을 마감하자 괴로운 시간을 보낸다. 할아버지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자신을 돌보는 손녀에게 폭력을 했다. 하지만 사랑하는남자를 만나 그림을 그리며 잘 살아보려고 노력하던 그 때 샬롯은 프랑스 남쪽에서 많은 작품과 1,300쪽에 이르는 일기 '삶인가? 혹은 연극인가?'를 남기고 1934년 10월에 아우슈비츠에서 임신한채로 죽는다. 샬롯이 참 예뻤다. 비행기에 내리면 샬롯 살로몬의 그림부터 검색해보고 싶었다. 내리자마자 본 샬롯의 그림은 거칠고 슬펐다. 그림이지만 움직이는 것 같았고, 차가워보였지만 안은 따뜻해보였다. 샬롯의 글을 좀 더 읽고 싶었다. 작업을 해야만 제정신이었고 살아있음을 느꼈던걸까? "나는 내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나의 이야기를 만들 것입니다."
3. 비행기 환승과 두 번 월요일
두 편의 영화를 보고 여러 앨범을 듣고 나서야 뉴욕 공항에 도착했다. 뉴욕 시간으로 월요일 아침. 기분이 이상했다. 시간 여행을 한 듯한 느낌이었다. "또 월요일이라고!" 시간에 갇힌 듯한 느낌도 들었다. 또 다른 세계로 온 것일까. 이른 아침, 공항은 분주했고 밀려드는 환승객과 여행객들로 정신이 없었다. 비행기 환승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신발도 벗어야했고, 환승만 하는 것인데도 검사하는 것이 많았다. 이 와중에 엄마의 조끼가 주머니가 많다는 이유로 보안검색대에서 걸리면서 시간을 지체하기도 했다. 페루 리마행 비행기는 무사히 탔고, 끝날 것 같지 않은 긴 월요일 속을 헤매고 있었다.
늦은 밤 시간이 되어서야 페루에 도착했다. 페루의 밤은 정말 깜깜했고 공기는 어색했다. 호텔에 도착해서야 겨우 월요일을 끝낼 수 있었다.
엄마와 나는 이 여행을 '요양'이 컨셉이라고 했다. 무리하게 어딜 가지도 말고 쉬고 싶으면 쉬고 눕고 싶으면 눕자고. 남미요양기(허안나, 글그림, 라마북스, 2021)를 읽으며 다짐했다. 이번 여행에서 꼭 난 회복하고 올 것이라고. 여행 전 준비로, 실제 여행으로, 그리고 여행 후를 기록하며 나는 남미를 세 번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