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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을 보내고

by Hee

2주 전쯤 시어머님이 급성 폐렴으로 돌아가셨다.

어떤 죽음이 황망하지 않겠느냐만은 어머님은 매일 요가와 산책을 거르지 않으며 건강을 신경 쓰셨기도 했고 크게 아프신 적 한 번 없으셨던 터라 어머님의 부재가 좀처럼 실감이 나질 않는다.


끝에서는 늘 처음을 돌아보게 된다고 처음 어머님을 뵙던 날이 생각난다.


그때 나는 남들에게 말하긴 조금 뭣한 이유로 걱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광주에서 태어났지만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일하면서 남편도 서울에서 만났는데, 알고 보니 남편은 대구가 고향이었고 남편을 제외한 가족들은 모두 대구, 포항에 살고 계시다는 것이다. 나는 서울 또는 전라도가 고향인 남자와 결혼할 거라는 아무 근거 없는 믿음을 갖고 살았기 때문에 대구가 나의 시댁이 될 거라곤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2000년대 후반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까지도 선배들은 광주 가려면 비자 발급받아야 되냐고 나를 놀려댔고 그때는 그런 농담이 가능한 시기였다. 그래서 혹시 시부모님이 되실지도 모르는 분들이 내가 광주 출신이라고 싫어하시면 어떡하나, 문화 차이가 너무 커서 내가 적응을 못하면 어떡하나 하는, 지금 생각하면 참 쓸데없는 이유들로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시댁에는 비교적 결혼이 늦은 아들의 여자친구가 궁금했던지 조카들까지 열몇 명의 가족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가족들끼리 대화가 많지 않은 친정에 비해서 시댁 식구들은 그 때나 지금이나 대화가 많았다. 처음 듣는 경상도 사투리의 홍수였다. OO(남편이름)아 니 밥 뭇나, 오는데 안 오래 걸리드나로 시작하는, 보수적이고 조용한 집안에서 자란 내가 보기엔 놀랄 정도로 시끄러운 대화가 이어졌다. 처음엔 낯을 가리는 성격인 데다 혼자 사투리를 안 쓰는 나는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도 모르겠고 가만히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러다 남편이 잠시 화장실을 간 사이에 어머님이 내 손을 잡으시더니 우리 아들과 꼭 결혼해 달라고 하시면서 환하게 웃으셨다. 그리고 나도 정읍이 고향이라며 반가워하셨다. 아, 어머님 고향이 전라도셨구나! 나는 어머님이 우리 엄마 같이도, 우리 엄마 친구 같이도 느껴졌다. 맞아 행복은 시끄러움이 아닐까, 나도 남편 가족들의 가족이 되고 싶다-라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결혼 이후에도 어머님은 늘 남편보다는 나를 위하고 예뻐해 주셨다. 신혼 초에 남편과 다투고 속상한 마음에 어머님한테 전화를 해서 하소연을 한 적이 있는데(지금 생각해 보니 매우 철없는 짓이었다), 어머님은 나보다 더 열을 내면서 남편 욕을 해주셨고 절대 지지 말라며 내 편을 들어주셨다. 명절에 음식하고 계실 때 도와드리려고 하면 방해만 된다면서 부엌에 못 들어오게 하셨고, 기어코 설거지라도 하려고 하면 남편한테 빨리 와서 너도 같이 하라며 잔소리를 하셨다.


그런 분이셨다 어머님은..


4월 초 어머님이 대구의 어느 대학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했다고 하셨을 때만 해도 돌아가실 수도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노인분들에게 폐렴이 얼마나 무서운 병이라는 걸 전혀 몰랐던 거다(폐렴은 70세 이상 노년층 환자에게선 사망 원인 1위이다). 처음 어머님을 면회하러 갔을 때 서울에 비해 이르게 봄이 찾아온 대구 곳곳은 목련이며 벚꽃이 만개해 있었고, 이렇게 꽃들이 예쁜데 어머님은 못 보시는구나 싶어 마음이 씁쓸했다. 잠들어 계시는 어머님에게 꼭 다시 일어나셔서 같이 꽃을 보러 가자고 가만히 속삭이고 나왔다.


그 후 1달간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중환자실에 입원하셨을 때 이미 어머님의 폐는 많이 망가져있었고 괴로운 인공호흡기를 쭉 달고 계셔야 했기 때문에 병원에서는 잠을 재우는 약을 계속 투여했다. 어머님이 긴 잠을 주무시는 동안 가족들은 많이 울었고, 우리 가족들이 늘 그렇듯이 많이 웃었다. 돌아가면서 중환자실 밖 벤치에서 자면서 밤을 지키거나 집에서 자다가도 병원에서 어머님 상태가 좋지 않으시다는 전화가 오면 놀라 달려갔다.


희망이 보이는 순간이 없진 않았지만 어머님은 조금씩 조금씩 안 좋아지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병원에서는 '임종 면회'라는 것을 하도록 했다. 그래도 나는 끝까지 어머님이 괜찮아지실 거라는 (또 다시 근거가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의료진들이 나보다 먼저 어머님을 포기한 것 같아 화가 났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화가 났다.


4월 23일, 결국 꽃이 다 져버릴 때까지 어머님은 깨지 못하시다 돌아가셨다. 아침에 소식을 듣자마자 운전을 하면서 대구로 내려가는 3시간 반 내내 참 많은 생각을 했다. 나는 어머님에게 어떤 며느리였을까.. 내가 있어서 조금은 더 웃을 날도 있으셨을까?



어머님은 정말 세상 쿨하신 분이어서 그 흔한 전화하란 소리 한 번 안 하셨고, 서울 놀라오시라고 해도 너희 힘들다며 한 번을 안 오셨다. 남편이 서울로 대학을 갔을 때도 남편 자취방 한 번 안 가셨다니 오죽할까. 그런 어머님이 내가 로스쿨을 졸업할 때 한 달음에 졸업식에 와주셨다. 덕분에 내가 서울에 있는 대학을 다 와보네- 라고 하시며 우리 엄마만큼이나 내 졸업을 기뻐하셨다.


내가 만질 수 있는 어머님의 흔적은 그때 어머님이 주셨던 축하 꽃다발에 꽂혀있던, 액자 뒤에 꽂아 보관해 두었던 카드 한 장뿐이다. 그 카드엔 '꽃 길만 걸어라'라고 적혀있다. 참 당신 다운 쿨하고 간결한 멘트다. 어머님은 이렇게 늘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사랑과 축복을 주셨다.



어머님, 오래도록 기억하겠습니다. 부디 그곳에선 아프지 마시고 부잣집 관식이 만나 행복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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