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 대한민국에서 디자이너로 살아간다는 것 - 2
나는 출근하지 않는 디자이너이다.
2005년부터 독립해 1인디자인기업이 되었으니, 13년째 출근하지 않는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물론, 사무실도 있고 정기적으로 하는 일도 있지만 어디서든 일할 수 있고 언제든 일할 수 있기 때문에 출근하지 않는 디자이너라고 스스로 말한다.
가끔 회사로 출근하던 때를 떠올려 본다. 아침 7시에 일어나 씻는둥 마는둥 옷입고 뛰쳐나간다. 만원 지하철을 타고 회사가 있는 곳까지 이동하고 무거운 다리로 지하철 계단을 올라 전쟁터까지 걸어간다. 가는길에 시간이 남으면 근처 편의점에 들러 커피도 한잔 사 마신다. 어제 야근을 했다면 자양강장제나 비타민음료를 마신다. 하지만 전날 야근을 했든, 안했든, 출근길은 항상 피곤하다.
그러면, 디자이너에게 출근은 어떤 의미일까?
대부분의 회사는 오전 9시에 출근하고 오후 6시에 퇴근한다. 디자이너도 마찬가지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똑같은 시간에 출근해 똑같은 시간에 퇴근하는 일반 회사원들 처럼 디자이너도 회사원의 시간에 맞춰 디자인업무를 한다.
디자인의 원천은 크리에이티브에서 나온다. 출근을 9시에 하고 6시에 퇴근하니 크리에이티브도 9시에 발현되기 시작해서 6시에 딱 멈춰야 한다. 창조적인 업무를 하는 사람들, 디자이너나 예술가, 음악가, 발명가 들의 크리에이티브가 과연 일반 회사원들과 똑같은 시간에 나올거라는 발상이 과연 온당한 발상인가?
그렇다면 크리에이티브는 어디에서 나올까?
디자인 시연을 할때 고객이 가끔 하는 질문이 있다.
"이거 어떻게 생각해 냈어요?"
그럴때마다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하늘에서 뚝 떨어졌습니다."
정말 그럴때가 많다. 기발한 생각이나 아이디어는 정말 아무때나 뚝 떨어진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갑자기 떠오르기도 하고, 도서관에서 책을 보다가도 생각난다. 낮잠 자다가 꾼 꿈에서 보기도 하고,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다가도 떠오른다.
한 광고회사의 카피 중에 이런 것이 있다.
'Idea is in the air'
기가 막힌 카피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말이다.
디자이너에게 크리에이티브는 정말 중요하다. 아이디어가 없으면 디자인도 안나온다. 그런데 디자이너들은 오늘도, 지금도, 나오지 않는 크리에이티브를 탓하며 모니터만 눈이 빠져라 쳐다보고 있다. 의미없는 핀터레스트, 리퍼런스 사이트 서핑으로 8시간을 소모한다. 물론 회사가 크리에이티브를 발현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제공한다면, 일 할맛 날 것이다.
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보면, 디자이너에게 9to6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디자이너는 직업의 특성상 '결과물' 이라는 것을 만들어낸다. 시각디자이너는 비주얼콘텐츠를 만들어내고, 제품디자이너는 멋진 시제품을 만들어낸다. 거꾸로 생각해보면 어떻게든 기발하고 완성도 높은 결과물만 만들어내면 그 디자이너는 할 일을 다 한 것이다. 9시에 출근을 하든, 오후 5시에 출근을 하든 결과물에 대한 퀄리티만 보장된다면 되는것 아닌가? 9시에 출근해 6시에 결과물을 만들어낸 디자이너는 일을 열심히 한것이고, 5시에 출근해 6시에 결과물을 만들어 낸 디자이너는 일을 대충 한 것인가? 근무태도라는 꼰대같은 단어 말고 이제 좀 쿨해지면 안될까?
나는 디자인을 하기 위해 수 많은 생각을 한다. 그냥 멍하니 앉아서(혹은 누워서) 생각할 때도 있지만, 하염없이 걷기도 하고 도서관에서 책을 보기도 한다. 하루종일 TV를 틀어놓고 생각할 때도 있고, 처음 듣는 음악을 플레이리스트에 담아 이어폰을 귀에 꽂고 생각하기도 한다. 생각이 정리되면 디자인작업은 순식간이다. 생각의 정리 없이 포토샵을 열고 디자인을 하는 것과 비교하면 생산성의 차이는 엄청나다.
디자이너에게는 생각하는 시간도 일하는 시간이다. 오후 5시에 출근한 디자이너도 사실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아이디어를 잡기 위해 끊임없이 생각하며 일한 것이다. 출근을 늦게 한다거나, 하지 않는다면, 크리에이티브 계열이 아닌 동료들에게는 그저 근태가 안 좋은 사람일 것이다. 그것은 인사고과에 반영되어 아무리 실적이 좋아도 근태가 승진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출근은 대부분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으로 한다. 또 같은 자리에 앉아 같은 사람들을 만나며 같은 커피와 같은 점심을 먹으며 일을 한다. 이 루틴한 환경속에서 어떤 크리에이티브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나는 혼자 일하며 다양한 근무환경에 대한 실험을 해보고 있다. 회사 다니듯이 사무실을 임대해 매일 아침 출근해보기도 하고, 여행을 다니며 일해보기도 하고, 카페에서 일해 보기도 하고, 집에서 일해보기도 했다. 이 실험은 아직도 진행중이긴 하지만, 적어도 매일 아침 같은 시간의 출근은 크리에이티브에 전혀 도움되지 않았다. 오히려 시각적, 감각적으로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환경이 크리에이티브에 더 큰 도움이 되었다.
2년 2개월간의 회사 생활 동안 나는 주니어 디자이너였으니, 그때의 크리에이티브와 지금의 크리에이티브를 단순 비교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단순 생존을 위한 디자인 보다 내가 가치를 느낄 수 있는 디자인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다. 회사에 있었다면 못했을 일이니까. 그렇게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조금씩 늘려간 결과 회사에 다닐때의 내 디자인 영역보다 훨씬 넓은 영역의 디자인을 하는 디자이너가 되었고, 다른 디자이너들보다 무기가 더 많은 디자이너가 되었다. 무기가 많다는 것은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양한 일을 함으로써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고, 프로젝트가 끝날때마다 리프레쉬함으로써 멈추지 않고 사업을 계속 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출근하지 않고 일하는 근무형태인 원격근무는 국내외의 여러 기업들이 벌써 시행하고 있고, 미국의 IT기업들 사이에서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나는 여행을 매우 좋아한다. 여행하면서 일하는 경우도 많은데, 미 서부 여행중 미국에 있는 지인의 집에 약 열흘간 머물일이 있었다. 여행 중에도 일은 계속 할 수 있었으나 여행을 계속 하지 않고 한국에 들어가야만 했던 이유 중 하나가 클라이언트 미팅이었다. 지인이 의아해 하며 물었다.
"왜 화상통화로 회의 하지 않아?"
그 당시 클라이언트가 지자체였던 터라, 차마 '저는 지금 여행중이니 이번 회의는 화상통화로 하겠습니다.' 라고 말할 수 없었다. 우리나라에서의 원격근무에 대한 인식은 좋아지고 있는 중이지만, 아직도 한국의 비즈니스는 갑을관계로 대변된다. 이런 인식에 대해 영어로 설명하기가 애매해서, 그냥 클라이언트가 날 실제로 만나는걸 좋아한다라고 얼버무렸다.
다행히 국내 젊은 IT기업들을 중심으로 출근에 대한 인식은 점차 변화해 가고 있다. 단순 출근에 대한 문제를 넘어 디자이너가 크리에이티브를 발현할 수 있는 환경에 대한 고민을 기업가들이, 회사들이 하기 시작했다는것 자체가 의미있는 변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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