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빛을 세우는 터전
2015년,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던 나는 세상에 없던 새로운 학교라는 슬로건을 통해 건명원을 처음을 알게 되었다. 인문, 과학, 예술 분야의 유명한 교수님들 강의를 무료로 들을 수 있다는 생각에 1기에 지원했지만 아쉽게 떨어졌었다.
언젠가 다시 건명원에 지원해야지 라는 생각을 갖고 사회생활을 한지 어언 5년, 지원 상한 연령인 만 30세를 앞두고 나서야 나는 다시 한번 건명원에 지원을 결심하게 되었다. 지원 시기가 보통 연초 1-2월 사이였기에, 거의 1년 전부터 D-day를 설정해두고 건명원 지원 시에 필요한 '자기소개서'와 '인생의 프로젝트'에 대한 나 스스로의 생각을 조금씩 정리해보기 시작했다.
2020년 1월, 어김없이 건명원 6기 모집 공고가 올라왔고, 나는 마감 기한에 맞게 자기소개서와 인생의 프로젝트에 대해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꽤나 오랜 기간 머릿속으로 생각해왔던 주제였지만 막상 써 내려가려 하니 쉽사리 정리가 되지 않았다. 고민의 흔적을 벽에 펼쳐놓고 보니 어느 정도의 가닥이 정리되는 듯했고, 그렇게 나는 내가 건명원을 통해 얻어 가고 싶은 '인생의 프로젝트'를 설정하며 지원서를 제출했다.
내가 바라보는 세상, 나의 고유한 문제의식이 명확하지 않아
내가 발견할 수 있는 문제도 명확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건명원에서의 공부를 통해
제가 풀 수 있는, 저 만이 풀 수 있는, 제 고유한 문제의식을 얻어 가고 싶습니다.
다행히 1차 서류 심사에 통과하고, 2차 평가를 앞둔 와중 건명원 운영 사무실로부터 메일 한 통을 받았다. 통상적으로 건명원은 2차 심사에서 면접과 그룹 토론을 진행하지만, 연초부터 확산된 코로나 여파로 인해 면접 평가를 서류 평가로 대체한다는 것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2차 평가에도 통과하였고 마침내 건명원 6기로 최종 선발되게 되었다. (올해도 탈락했다면 나이 제한 때문에 난 앞으로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설레 하던 것도 잠시, 코로나 여파로 애초 계획되어 있던 3월 개강은 미뤄졌고 우린 결국 6월 중순에서야 감격스러운 첫 등교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코로나 확산 방지를 위해 마스크 착용과 칸막이 설치 등 철저한 방역과 소독을 병행해서 오프라인에서 수업을 듣는 게 녹록지는 않았다. 수업 때엔 마음대로 질문도 할 수 없고, 토론도 할 수 없었다. 저 옆에 눈이 반짝거리는 동기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너무도 궁금한데 과거의 건명원처럼 함께 토론하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진 것이 너무도 아쉬울 뿐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어쩌랴. 그렇게 비운의 기수, 건명원 6기의 첫 학기가 시작되었다.
쉽게 설명하자면, 건명원은 일종의 사설 학교이다. 정식 교육 과정 안에 들어가는 학제는 아니지만, 엄연히 교수진과 교육위원이 있고, 학생들과 운영 간사님도 계신다. 두양 문화재단에서 다음과 같은 취지로 설립하였으며 모든 교육과정은 무료이다. (공부에 필요한 책도 무료로 주신다!)
건명원(建明苑)은 “문화예술분야”의 창의적 리더와 인재육성을 위해 (재)두양문화재단에서 설립 및 운영하는 인재육성의 산실입니다. 특히 19세에서 29세 사이의 청소년들이 창조적 문화예술의 향기 속에서 미래의 꿈과 비전을 달성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지원사업을 실시하고자 합니다.
건명원 학생들은 매주 수요일 오후 6시 30분 ~ 10시 30분, 매주 토요일 오전 9시 ~ 오후 1시에 서울시 종로구 가회동에 위치한 건명원 교실에 모여서 공부를 한다. 하루에는 늘 2개의 수업이 있고, 여러 교수님들이 번갈아가면서 수업을 하신다.
수업은 크게 역사와 철학을 축으로 하는 인문학과, 종교와 미학 등을 다루는 예술, 뇌과학과 물리학 등을 다루는 과학으로 축이 나뉘어 있고, 각 분야의 가장 저명하신 교수님들이 오셔서 수업을 진행하신다. (최근에는 경영학, 미디어 등 다채로운 수업들도 추가되었다고 한다) 하나 특이한 점은 대부분의 교수님들이 별 다른 발표 자료나 교재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인데, 이는 교수님들이 기성 대학에서 배우는 기능적 지식과 건명원에서 가르치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스스로 보여주시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몇몇 교수님들은 해당 영역에서 굉장히 급진적 혹은 진보적인 주장을 하시는 분들인 점을 감안할 때, 건명원에 오시는 교수님들 또한 참으로 '건 명원스럽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잠깐 - '건명원스럽다'가 도대체 무엇일까?
아마도 건명원을 다녔던 학생들이라면 200% 공감할 이야기겠지만, 건명원에선 왕왕 '건명원스럽다'는 형용사가 사용된다. 그 누구도 정의하지 않았지만 아마 건명원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그 어떤 건명원만의 정신을 말할 때 주로 사용되곤 한다. 하나 놀라운 건, 건명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님이나, 수업을 듣는 학생들 모두 스스로 '건명원스러움'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더 건명원스러워지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이다.
건명원 비운의 기수, 건명원 6기는 비록 코로나 확산 방지를 위해 다른 기수처럼 자유롭게 토론하고 프로젝트를 하며 수업을 하진 못하고 있지만, 교수님 한 분 한 분께 듣는 수업들 그 자체로도 너무 재밌고 유익하다.
바다로부터 배워보는 인류 문명사
무용성 관점에서 바라보는 예술 철학
이슬람 제국과 문명의 재조명
가야를 통해 생각해보는 소사회, 소국가의 의미
뇌과학을 통해 바라보는 인간의 의미
기타 등등
강의 제목만으로 모든 내용을 전달할 순 없겠지만, 건명원 수업들은 학제적 경계가 없고, 학계 주류의 기능적 지식을 답습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대부분의 수업이 책에선 알려주지 않는, 정사보단 야사의 이야기들이 많지만 그 수업들을 듣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뒤집어 보거나, 틀을 깨서 생각해볼 수 있는 강력한 자극이 된다.
교수님들 왈, 건명원의 꽃은 학생들 간의 토론 수업에 있다고 하셨건만 건명원 6기는 코로나 여파로 강의실에서 토론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난 8월 코로나 2차 위기 이후 건명원 역사 최초로 Zoom 기반 화상 수업이 시작되면서 처음으로 학생들 간의 토론 수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건명원 학생들과 답이 없는 토론 주제에 대해 양쪽으로 나뉘어 토론하는 경험은 자극적이고 흥미진진하다. 서로 다른 각자의 자리에서 스스로 빛나고 있던 학생들인지라 아주 사납고 매서우며 자기 주관이 확실한 친구들이 많다. 그런 친구들이 서로 부딪히고 토론하는 모습을 보면, 스스로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배움들을 많이 얻어갈 수 있었던 것 같다.
건명원엔 수많은 장점이 있다지만, 뭐니 뭐니 해도 그중에 제일은 함께 공부하는 학우들, 학생들이다. 우선 건명원엔 정말 다양한 학생들이 지원하고, 또 그중에 색깔이 특이하고 주관이 명확한 친구들이 선발되는 것 같다. 지원 가능 나이가 만 30세까지인지라 대부분 비슷한 나이 또래의 친구들이지만, 항공기 조종사, 기자, 사업가, 개발자, 대학원생, 작가 등 각자의 자리에서 뚜렷한 주관을 갖고 자신만의 삶을 개척하고 있는 친구들이 모여있는 것만으로도 신기하고 재미있다.
사실 비운의 6기에선 오프라인으로 학생들 간 교류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아 조금 더 가까워지지 못한 것이 많이 아쉽다, 그래도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 이야기 나누며 서로의 삶에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 친구들이 생겼다는 사실에 마음이 든든하다.
건명원 중간 회고를 하며 건명원의 좋은 내용들만 써놨지만, 사실 현실 속에서 건명원을 다닌다는 것의 무게는 그리 가볍지 않다. 주 2회의 수업과 간헐적으로 나오는 과제, 수업 내용을 복기하기 위해 개별적으로 쏟아야 하는 공부 시간들까지. 직장을 다니며 이 모든 것을 병행하기에는 결코 녹록지 않은 강도이다. 게다가 건명원은 출결 및 지각에 대해 굉장히 엄격한데, 결석 5회일 경우 중도 탈락되며, 시험을 잘 못 보거나 학습 태도가 성실하지 않을 경우에도 운영위원회를 통해 탈락될 수도 있다.
건명원 수업은 12월 말까지 계속되고, 12월 말 건명원 최종 프로젝트 발표를 마지막으로 졸업하게 된다.
누군가는 실용주의와 시장 가치만 남은 2020년에, 매주 몇 시간씩 앉아 인문학과 철학 공부를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 물을 수 있다. 하지만 건명원에서 듣는 수업들과 그 안에서 오는 생각들은, 점점 더 불확실성이 커져가는 세상에서 내가 좇을 수 있는 빛을 찾거나 혹은 나 스스로 빛을 발하는 힘이 될 것이라 (적어도) 나는 확신한다. 그것이 건명원(建明苑) 그 이름 속에 담긴 뜻 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