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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학거사 Apr 27. 2024

바보처럼 살아가기에...

욕을 먹더라도.. 솔직히 여성(여자)분들을 바라보며, 인간 간의 정보와 관계에 대한 부분과 삶에 도움이 되는 부분을 지니며 그것이 다인 양 짖어대므로 인하여.. 세상적 복합구조 기반의 관계 및 확장성의 한계를 지니는 것은 아닌가? 저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더불어 종교(신앙)애서도 너무나 초보적인 구조적 모순을 자행하면서도 그게 뭔지? 를 모르며.. 알려주는 대로와 기존에 해오는 방식을 벗어나면 죽는 줄 아는 한계로 인하여.. 스스로의 영적 고갈과 메말라감에도 인지하지 못하며, 아니~ 좋은 것들은 분명 올 것이며 주실 것이라는 헛된 희망을 양껏 부풀려 버림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는 참으로 삶에 관한 지식적 기본의 근거를 확보하지 못한 멍함의 극치를 이루는 것으로 스스로부터 자생적이며 독립적인 생명력을 확보해야함에도 자신의 앎과 경험, 관계에 진정한 창의적 기반을 이루지 못함에 대한 반증은 아닐까? 합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는 다~ 내려놓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하심에 우리는 진정 우리가 알며 행하는 것들과 살아감에 있어.. 깊이 있는 자기대면과 성찰을 통하여 어디에 어떤 요인과 더 나은 방향, 절대적 조건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선, 하나하나씩 정리를 해 나가보면, 행위와 사고와 감정 기반의 인지와 과학적 속성에 있어 데이터는 사물의 표현 방식이라 하고 정보는 그들의 의미 있는 패턴 배열로 보면, 지식은 인간적 행동에 따르는 그 정보들의 적용과 활용 및 사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행위/사고/감정 등의 인지적 속성과 활용 및 접근의 최고봉에는 지혜가 자리매김한다면 그는 직관과 인식의 모든 감각을 통한 지식의 분별 있는 사용을 이루며, 이는 지식의 Learning ⤇ 지식의 Creation ⤇ 지식의 공유 및 활용 ⤇ 가치의 창출 ⤇ 지식의 (양적 질적) 확대를 이루며 삶의 질과 행태의 극대화를 이루어내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정보는 인간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으며 일어나는 셀 수 없이 많은 사건과 사물들의 관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최소한의 인식의 단위라 할 수 있고, 지식은 그러한 정보가 사회/문화적 맥락 혹은 이론적 맥락에 의해 구체적 의미가 부여된 정보와 정보들 간의 관계라 할 수 있습니다. 왜? 이런 쓰잘머리 없는 정리를 해봄에는 기초가 없다기보다는 인간의 잠재력과 인간 간의 소통을 위한 상호번역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그로 인간과 세상의 상호작용에 폭 넓은 이해가 가능하게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들 간의 인식의 증대 및 지식의 향상과 그를 통한 재미와 기쁨으로 세상은 살만한 곳이라 느끼며 생을 영위하고, 그를 기반으로 종교적 깊이를 확보하고 세상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절대자와의 관계를 돈독히 해나가야만 하기 위해서라도 다지고 다져나가야 할 것입니다. 현재를 더 넓게 확장하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의 가치를 증폭시키기 위한 개인적 변화와 개혁은 때로 묵은 습관과 절차와 전통에 대한 용기 있는 절단/단절과 더불어 포기는 꼭 필요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낡은 사고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사조와 흐름을 받아들이며.. 스스로의 가치와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과 걷어냄을 마다하지 않는 가운데 각자들에게 새로운 미래가 비로소 펼쳐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논리력을 바탕으로 분석 및 통합하는 사고의 방식의 시스템적 사고를 하라는 것이 아닌, 그 어떤 창의적 활동을 설명할 때는 “흐름”이라는 단어가 자주 사용되기 때문으로 어떤 일에 몰입하여 자신의 창의력을 완전히 쏟아 붓고 지식과 느낌, 본능의 모든 힘까지 활용하는 순간을 표현하는 단어가 “흐름”이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자신을 침잠하여 스스로를 내려놓고 돌아보면, 이것은 이래서~ 아니 되고, 이것은 우리 교회/목사님이 제시하는 것과는 다름으로 아니라~함은 없는지 각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은 자신에게 정말 중요한 그 모든 것을 남에게 열쇠를 맡긴 꼴로 저는 현실에서도 그러한 내용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되는데, 재산이 많으신 유명 여사 분께서 자신의 대리인으로 젊은 변호사를 위임하고 도장을 맡겼더니, 아니 그 많던 재산이 하루아침에 변호사에게 이전되고, 거리에 내쫓겨 앉았다는 내용을 제 근처에서 들었습니다. 뭐 있어야~ 주든지 말든지..가 아니고, 천하보다 소중한 자신의 구원을 누구에게 맡기고 스스로는 따 놓은 당상이라 여기는 행동 자체가 그러함과 같다는 것과 그렇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트랩(함정)이 빠져서는 아니 되므로.. 스스로 무릎 꿇어 아뢰고, 변론하며 진정 알려 주십사하라는 것입니다.  주일예배 참석하여 아는 것이 뭐가 있나요? 저는 별로 없던데.. 뭘 그리 대단한 것을 통하여 자신의 영적 성숙을 기대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천국은 자신이 침노하는 것으로 과연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사나 죽으나 하며 주님을 진정 찾아보신 적이 있으신가?를 먼저 생각해 보심이 있어야 한다 생각합니다. 그 다음 제단에 자신이 신령과 진정으로 주님께 그 무엇을 올려 드렸나 살펴보고, 사랑으로 눈치 안보며 남을 위하여 눈믈 흘리며 창자가 끊어질 듯 기도해 본적이 있는가? 솔직히 밝혀보며 신앙(종교)생활 영위가 옳은 것은 아닌가? 합니다.     


어~이.. 당신!! 뭘 그렇게 힘들고 어렵게 믿어.. 잘난 척하지 말고, 너나 잘해~ 하셔도 저는 “넵”할 것으로 모든 것은 아는 만큼 보이고, 결과도 그에 따름이니, 뭐라 하기도 싫고, 저와 뭔? 관련성이 있겠습니까? 만은 기도하고, 무시로 기도하며 살아가다보면.. 아닌데, 옳다하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으로 글로라도 아니라~ 해보는 것뿐입니다. 모든 것은 주님께서 손잡아주시느냐 아니냐에 따라 천양지차를 넘어 극 대극이므로 그 책임은 자신의 것이며, 스스로의 결정이라 제가 뭐라 할 수 있겠소~ 만은 정신은 차려야 될 것 같다는 말씀은 입이 간지러워~ 꼭 드리고 싶다는 거룩한 발로라 이해해 주시길 빌며.. 저 천국 넘어가 함께 하기만 바라뿐입니다. 믿음도 영적적인 부분이므로.. 말씀과 말씀들의 관계를 하늘 타임라인에 맞게 이전과는 다르게 정의하는 것을 필요로 하며 그 맥락을 바로 잡아 그에 대한 통찰을 전제로, 그 관계를 이해하고 그 동안의 것들을 새롭게 받아들이며, 낡은 것들을 시대성을 기반으로 하는 맥락으로 전환하여야 할 것입니다. 매일 매일 부흥/축복/오실 것 등으로 만 제시함에 홀망해 하는 순간 말씀과 말씀의 관계를 시대성을 기반으로 다양하고 유연하게 연결하여 맥락을 확보함은 물 건너갔다고 함이 옳을 것으로 자유하라 하심의 도를 넘어감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주신 말씀을 받아들여, 세상적 정보와 그에 대한 적용에 재구성 및 재해석하여 자신의 믿음의 과정에 새로운 무엇인가? 가 점진적으로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나야 함의 중심을 이루어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종교적 관습이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시대적인 상황에 도전적으로 주심에 따르는 적용에 있어 스스로 국한하는 것이 아닌, 기도나 감동으로 주심으로 그 자체를 중심화하고 대처한다는 것으로 표현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믿는 자 모두에게 능력주시고, 모든 것을 부여해 주셨음에도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틀은 우리 것이야~ 함으로 능력이 부여돼 있음에도 벼룩이 되어 우리 교회/목사/교단으로 구성된 유리 천장 기억을 제거하지 못하고 경직되어 뒷다리가 뒤틀어진 자신을 발견해야 됩니다. 영적 자유함을 영위할 수 있는 창의적 측면에서 보면, 얼마나 독창적인 시간으로 현재의 상황을 주신 말씀으로 이해하고, 적용해 나가려하는 자들로 그 기준으로 신비한 능력이나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재능이 아닌, 얼마나 내려놓고 받아내기 위한 시간을 내 무릎 꿇었는가?가 관건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세상 살아감도 종속적으로 살아가며.. 바보처럼 멍할 것이 아닌, 무한광대하신 분을 통하여 자신도 능력자로 스스로의 가치를 재발견하시는데 지혜와 희망을 지니시길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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