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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궤를 만든 브살렐과 현대판 바리세인들..

by 잡학거사

브살렐의 이야기는 단순한 역사적 기록이 아니라, θ이 사람을 세우실 때 무엇을 보시는지 보여주는 가장 깊은 증언 중 하나다. 그는 스스로를 내세운 적도, 뭐라도 주장한 적도 없다. 그저 θ의 영에 감동되어 지혜와 총명과 재능을 받은 자로서, 맡겨진 성막과 성소의 모든 기물을 묵묵히, 그러나 가장 정밀하게 만들어 낸 장인이었다. 그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것은 단순한 예술이 아니라 θ께서 친히 거하실 공간을 이루는 거룩한 질서였다. 그는 스스로를 높이기보다 θ의 뜻에 맞추기 위해 자신의 경험, 감각, 기술을 다 내려놓고 오직 주어진 패턴을 따랐다. 이런 종류의 순종은 단순한 기술적 순종이 아니라 내적 질서의 순종이었고, 혼자가 아니라 공동체의 중심에 θ이 계시게 하는 구조적 순종이었다. 브살렐의 손은 정확했지만 그의 마음은 더 정확했다. 그 마음은 자신이 빛을 내기 위해 움직인 것이 아니라 θ이 나타나시도록 비워진 공간을 정교하게 만드는 자리였다. 이러한 태도는 θ이 사람에게 기대하시는 성결한 일꾼의 모델을 보여 준다. 반면 현대의 바리세인이라 불릴 만한 사람들의 특징은 겉으로는 거룩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을 중심에 놓는 데 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성경의 단어를 잘 알고 절차를 잘 외우며, 전통을 자신들의 권위의 근거로 삼는다. 그러나 정작 그 전통을 θ께 돌리지 않고 자신들의 지위와 체제 유지의 장치로 삼는다. 겉으로는 율법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율법을 이용해 사람들을 평가하고 분류하며, 자신들의 해석만이 옳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태도는 과거의 바리세인과 동일한 패턴으로 반복된다. 그들은 진리를 지키려 한다기보다, 자신들이 진리의 관리자라고 착각하는 순간부터 스스로 θ보다 앞서고, θ이 움직이시는 일을 해석 이전에 판단하려 든다. 그 결과 새로운 일, 새로운 은혜, 새로운 사람을 받아들이기보다, 자신들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배척하는 일에 익숙해진다. 브살렐이 θ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 “보여지는 사람”이 되기보다 “사용되는 사람”이 되려 했던 것과 달리, 현대의 바리세인은 보여짐을 통해 인정받고, 인정받음으로써 영향력을 키우는 것을 당연한 흐름처럼 여긴다. 브살렐은 드러날수록 사라졌고, 그 사라짐이 아름다운 영적 겸손이었지만, 현대의 바리세인은 드러누워 있을수록 뜻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규칙을 강조하고, 룰을 만든 후 그 룰의 해석 권한을 자신들의 손에 묶어 둔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오직 진리를 위한 행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진정한 진리는 사람을 높이는 방향이 아니라 θ을 드러내는 방향으로 흐르는데, 그들은 종종 θ을 말하지만 θ을 드러내지는 못한다. 브살렐에게 주어진 기술은 자기 능력의 과시가 아니라 θ의 거처를 세우는 도구였고, 그의 손은 은혜를 담는 그릇처럼 움직였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을 θ께 돌려드리는 방식으로 사용했다. 이런 자세는 외형적으로는 기술자이지만 영적으로는 θ의 뜻을 구현하는 통로였다. 그의 작업은 사람의 박수보다 θ의 시선을 의식한 것이었고, 그래서 그의 작업물은 금이나 은의 값보다 더 귀한 순종의 흔적을 남겼다.


그는 율법학자가 아니었지만 θ의 말씀을 더 정확하게 따라간 사람이었다. 그가 만든 기물은 명령 그대로였고, 그렇기에 임재의 무게를 견딜 수 있는 구조가 되었다. 현대의 바리세인은 이러한 브살렐의 태도와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그들은 θ을 말하면서도 사람의 시선을 더 많이 신경 쓰고, 누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따라 열심의 크기를 조절한다. 겉으로는 검소와 경건을 말하지만 속으로는 영향력, 호감도, 자리, 학력, 조직, 네트워크 같은 외적인 요소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런 모습은 과거의 바리세인들이 율법의 문자에는 집착하되 율법의 정신에는 무감각했던 것과 동일하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헌신을 재단하는 데 능숙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드려야 할 헌신에는 점점 무뎌진다.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책임을 무겁게 받기보다 권위의 이익을 즐기려 들고, 공동체를 세우기보다 자신에게 충성하는 구조를 만들려 한다. 브살렐은 θ이 맡기신 일을 할 때 다른 사람과 경쟁하지 않았고, 자신의 위치를 따지지 않았으며, 오로지 완성도를 통해 θ을 영화롭게 했다. 그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자리에서도 충실했고, 작은 부분 하나도 대충 넘기지 않았다. θ이 명하신 패턴이 곧 그의 기준이었고, 그 기준 앞에서 그는 인간적 변형이나 자기 주도적 해석을 끼워 넣지 않았다. 그가 만든 언약궤의 덮개 하나, 촛대의 잔 하나도 자기 감각을 따라 만든 것이 아니라 θ이 보여 주신 방식 그대로였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단순한 장인의 기술이 아니라 θ과 함께 만들어낸 공동작업이었다.


하지만 현대의 바리세인은 기준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기준을 만들어내는 데 익숙하다. θ이 주신 원칙 앞에서 자신을 굽히기보다, 원칙을 자신들의 해석 아래 두려고 한다. 그들은 ‘이 정도면 된다’는 감각을 영적 판단이라고 착각하고, 공동체의 경건을 자신들의 규율로 대체한다. 새로운 사역이나 새로운 사람을 바라볼 때도 본질을 보지 않고 외적 요건으로 먼저 판단하며, θ이 사용하시려는 사람도 자신들의 기준에서 멀어지면 어렵다는 결론을 쉽게 내린다. 이런 태도는 결국 공동체를 보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θ의 역사를 막는 장벽이 된다. 브살렐의 이야기와 현대의 바리세인의 모습은 이렇게 서로를 선명하게 비춘다. 한쪽은 θ을 위해 자기 자신을 비우는 사람이고, 다른 한쪽은 θ을 말하지만 자기 자신을 채우는 사람이다. 한쪽은 θ의 일을 이루는 과정에서 자신이 드러나지 않기를 바라고, 다른 한쪽은 θ의 이름을 말하면서 자신이 드러나기를 바란다. 한쪽은 순종을 위해 기술을 사용하고, 다른 한쪽은 자신들의 권위를 위해 지식을 사용한다. 한쪽은 성막을 세우는 손이고, 다른 한쪽은 성전을 무너뜨리던 사람들의 마음과 흡사하다. 결국 브살렐의 길은 θ을 향한 길이고, 현대의 바리세인의 길은 자신을 향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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