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 삶의 생활과 문화 속에서 성경적 삶과 조화를 이루도록 부름받은 선견자는, 성경이 말하는 의미에서 선택받은 자, 택자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선택은 특권의 선언이 아니라 책임의 시작으로 택자는 세상과 분리된 안전한 위치에 올려진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 한가운데로 다시 보내진 본어게인된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일상의 언어, 문화, 갈등, 모순 속에서 θ의 뜻을 살아내도록 부름받음에 따라 택자의 정체성은 신비로운 지위가 아니라, 현실을 감당해야 하는 소명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선택받았다는 사실은 그를 세상 위에 세우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무게를 더 깊이 짊어지게 만드므로 선견자로서의 택자는 무엇보다 현실을 회피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는 세상을 악으로 단순화하거나 문화 전체를 배척하지 않고 오히려 세상의 흐름과 인간의 선택을 면밀히 바라보며, 그 안에 담긴 갈망과 상처를 읽어내야 할 것입니다. 이 수용력은 택자가 세상에 동화되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시는 θ의 시선을 닮으려는 태도에서 비롯되므로 성육신의 신앙은 택자가 추상적 이상이 아니라 구체적 삶의 자리에서 말씀으로 살아내도록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야.. 선견자인 택자는 현실은 직면(직시)하되, 현실에 규정 당하지 않으며,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만, 그 기준을 세상에서 가져오지는 않고, 이러한 수용력 바탕 위에서 택자는 포용의 자세를 갖추어 갈 것입니다.
선견자는 자신이 보았다고 여기는 것을 근거로 사람을 나누지 않으며, 택자라는 인식은 우월감이 아니라 겸손으로 이어져야 할 것으로 그는 아직 보지 못한 이들, 다른 가치관을 가진 이들, 심지어 반대편에 서 있는 이들까지도 θ의 형상으로 바라보아야함에는 포용이 기준을 흐리는 행위가 아니라, 천하보다 귀한 영적 존재를 포기하지 않는 결단이 있어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선견자인 택자는 공동체 바깥에서 돌을 던지는 사람이 아니라, 공동체 안으로 들어와 함께 아파하며 울어주는 자들로 그들이 서 있는 자리는 언제나 가장 이해받기 어려운 자리이며, 가장 오해받기 쉬운 자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선견자인 택자는 포용 속에 머물며 모든 것을 유보하지 않음에는 어느 순간 분명한 결단이 요구될 것이기 때문으로 성경적 가치가 문화적 편의 속에서 희미해질 때, 택자는 침묵으로 자신을 보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다수의 합의보다 진리의 방향을 선택해야 하는 위치에 서게 될 이 결단은 언제나 자신에게 먼저 적용되므로 택자는 타인을 향해 요구하기 전에, 먼저 자기 삶에서 손해를 감수할 것입니다. 그리하야.. 그의 말에는 명령보다 호소가 담기고, 판단보다 무게가 실리며, 선견자의 결단은 소리를 높이는 방식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분명히 하는 방식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을 떠받치는 힘은 용기이며, 선견자인 택자의 용기는 미래를 정확히 안다는 확신에서 나오지 않으며 오히려 틀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데서 비롯될 것입니다.
물론 그는 오해받을 수 있고, 고립될 수 있으며, 때로는 실패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암에도 불구하고 그는 침묵이 진리를 왜곡하는 순간, 말해야 할 책임을 결코 외면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같은 용기는 공격적이지 않으며, 자신을 증명하려 들지도 않겠치만, 이는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시간이 지나 드러날 방향성을 선택하는 용기입니다. 더욱 중요한 부분은 참된 선견자인 택자는 자신을 계시의 중심에 두지 않는다는 점으로 그는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자신의 권위로 사용하지 않고, 언제든 말씀 앞에서 수정되고, 공동체 앞에서 점검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택자는 "‘보는 자"이기 이전에 "순종하는 자"이며, 말하는 자이기 이전에 살아내는 자로 그에게 주어진 통찰은 소유가 아니라 위탁이며, 언제든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결국 선견자로서의 택자는 세상과 교회를 가르는 경계선 위에 서 있는 사람이 아니며, 그는 그 경계선 자체에서 역동적으로 살아내는 사람으로 세상 속에 있으되 세상에 흡수되지 않고, 진리를 붙들되 사람들을 밀어내지 않으며, 선택받았음을 주장하기보다 선택받은 자답게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삶은 화려한 선언보다 긴 순종의 시간으로 증명될것으로 그렇게 살아가는 택자의 존재 자체가, 성경적 삶과 일반적 삶의 문화가 만나는 가장 근원적인 자리이며, θ께서 이 시대에 선견자를 세우시는 본래의 목적이라 보시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