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결정도 하지 않는다는 멍청함의 그 자체

by 잡학거사

성경은 인간이 무너질 때를 언제나 “악을 적극적으로 선택했을 때”로만 설명하지 않으며, 오히려 더 자주 등장하는 실패의 원인은, 아무 결정도 하지 않았다는 착각 속에서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태도로 제시합니다. 판단을 유보하고, 입장을 정하지 않고, 흐름을 지켜보기만 하는 상태는 중립처럼 보이지만, 성경적 관점에서는 가장 무책임한 상태로 그것은 지혜가 아니라 멍청함이며, 신중함이 아니라 내버려두거나 방치한다는 의미의 방기입니다. 선택하지 않았다는 말은 실제로는 성립하지 않으며, 인간은 살아 있는 한, 매 순간 무언가에 편승하고 있기 때문으로 다만 그 선택이 의식적이었는지, 무의식적이었는지의 차이만 있을 뿐일 것입니다. 선택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순간, 이미 가장 강한 흐름에 자신을 내맡긴 상태가 되는데, 마지막 시대의 가장 큰 위험은 사람들이 악을 택해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택하지 않았다고 믿는 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와의 실패는 노골적인 반역이 아니었습니다. “θ을 거부하겠다”는 선언도 아니었으며 θ이 정하신 영역을 스스로 판단해도 될 것처럼 여긴 순간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정도는 괜찮지 않겠느냐는 생각, 굳이 결정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는 태도가 죄의 출발점이었습니다. 그 순간 하와는 선택하지 않았다고 느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θ의 말씀보다 자신의 판단을 선택한 상태였습니다.


마지막 시대에도 동일하며, 사람들은 자신이 악을 택하지 않았다고 말하겠지만, 그러나 성경은 정확히 묻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택했는가?” 아무것도 택하지 않았다는 대답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자기기만일 뿐은 명약관화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께서 광야에서 받으신 시험은 인간이 얼마나 쉽게 “편리함”을 기준으로 판단을 미루는지를 정확히 보여주는데,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제안은 악해 보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합리적이고 현실적이었습니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을 해결하라는 제안으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시험도 안전을 보장하는 제안처럼 보였고, 세상의 영광을 주겠다는 말 역시 고난 없는 통치라는 매력적인 조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어떤 시험 앞에서도 판단을 미루지 않으셨으며, “지금은 상황이 어려우니 나중에 결정하겠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침묵하지도 않으셨으며 말씀으로 즉시 거절하셨는데, 이는 시험을 통과하는 방식으로 시험은 언제나 선택을 유보하라고 속삭이지만, 믿음은 언제나 즉시 기준으로 돌아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역시 광야에서는 θ을 찾았지만, 가나안에 들어가 안락함을 누리자 점점 판단을 내려놓았으며, 우상을 택하겠다고 결단한 것이 아니라, 그냥 따라가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는 것으로 이것은 성경이 반복해서 경고하는 멍청함의 극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적극적인 배교보다 더 위험한 것은, 아무 결정도 하지 않은 채 환경에 순응하는 태도로 신명기가 “배부르고 살이 쪄서 θ을 잊을까 두려워하노라”고 말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인간은 고통보다 편안함 속에서 더 쉽게 판단을 포기하므로 마지막 시대의 시험이 잔인한 이유는, 너무 편안해서 시험으로 인식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 결정도 하지 않았다는 태도는 종종 지혜나 신중함으로 포장되는데, “아직은 때가 아니다”, “괜히 문제를 만들 필요는 없다”, “조금 더 지켜보자”는 말은 진정 성숙해 보일 수는 있겠지만, 반복될수록 영적 감각을 마비시켜 버립니다. 성경에서 빌라도는 예수의 무죄를 알고 있었으므로 그는 판단할 수 있었으나 결정을 미루었고, 그 결과 가장 중대한 선택을 군중과 체제에 넘겨버리는 우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죽이라고 명령하지 않았으나 그는 예수를 지키지도 않음의 그 중립이 곧 유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시대의 사람들도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할 것으로 적극적으로 진리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진리를 위해 서지도 않으며, 스스로를 안전하다고 여기지만, 성경의 기준에서 재단해 본다면 이는 이미 선택을 넘겨버린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파도나 세상의 흐름이 빠를수록, 가만히 있는 사람은 더 빨리 떠밀림은 당연한 귀결로 선택하지 않는 것은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강한 방향으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를 “이 세상 풍조를 따르는 것”이라고 말하며, 이는 사상적 동의가 없어도 가능하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면 된다는 것으로 교회도 예외는 아닐 것으로 절대 자유롭지는 못할 것입니다. 진리를 말하지 않는 선택, 불편한 말씀을 미루는 태도는 평안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겠지만, 실상은 분별력을 포기한 것일 뿐입니다. 마지막 시대의 교회가 위험한 이유는 공격 받아서가 아니라, 너무 조용하기 때문으로 성경이 마지막 때를 향해 반복적으로 “깨어 있으라”고 말하는 이유는 너무나 명확해집니다. 깨어 있음은 감정 상태가 아니라, 판단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로 자연적으로 흘러가지는 않게 하겠다는 의지라 표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매 순간 다시 묻고, 다시 선택하겠다는 결단으로 이것은 피곤한 삶이 아니라, 진정으로 인간답다고 할 수 있으며.. 인간답게 사는 방식으로 선택하지 않아 선택되는 상태에서 벗어나는 길은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으로 질문해야 하고, 판단해야 하며, 때로는 거절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야.. 예수께서는 좁은 길을 말씀하셨으며, 그 길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자동으로 갈 수 없기 때문으로 의식하지 않으면, 결정하지 않으면, 그 길에는 들어설 수 없다고 하십니다.


마지막 시대의 시험은 극적인 배교가 아니라, 아무 결정도 하지 않았다는 멍청함의 극치로 편안함에 취해 판단을 내려놓고, 무관심 속에서 흐름에 몸을 맡기는 태도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김은 거대한 결단이 아니라, 오늘의 작은 선택에서 시작되므로 성경은 지금 이 순간도 물어 옵니다. “오늘 너희가 누구를 섬길 것인가?” 라는 이 질문에 답을 준비치 않음은 가장 어리석은 결정이며 멍청~ 멍청 그 자체의 극치인가?를 침잠하여 돌이켜 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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