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평화롭게 전국이 멈춘 날

2022년 4월 3일, 5일 차 기록

by Rhi hyun


동쪽 햇볕이 떠오를 무렵 일어났다. 전날 맡았던 퀴퀴한 유럽인 체취는 아침에도 여전했다. 체크인 직후 방에 들어오자마자 창문을 일부 열었으나 하루가 지나도 빠지지 않았다. 창가로 가니 운하와 공원, 그 너머로 아침의 고요한 도시가 펼쳐졌다. 코는 힘들었지만 눈은 차분했다.


이른 시간 조식을 먹으러 내려갔다. 빵을 내부에서 회전시키는 생소한 방식의 토스터기가 있었는데 사용법을 몰라 좀 태우기도 했다. 그래도 테이블 너머로 보이는 잔잔한 운하와 그 너머의 풀밭, 한창 싹이 트는 중인 나무들이 있었기에 훌륭한 조식이었다. 모든 게 편평하고 낮은 도시의 외곽에서, 햇살과 함께하는 아침 식사였다.

오전 8시 무렵 체크아웃을 마친 뒤, 오른편에는 운하를 끼고 왼편으로는 햇살을 받으며 Kronenburg역으로 걸어갔다. 같은 방향으로 가는 두 명의 여행자가 끄는 캐리어 소리가 덜덜거리며 들리긴 했어도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게다가 일요일이었다.



고요한 아침의 도시
모처럼 맞이한 여유로운 식사



트램을 타고 전날 겉모습만 훑고 지나쳤던 국립미술관으로 향했다. 깨끗하게 닦인 창밖의 모습이 북쪽으로 이동함에 따라 점차 바뀌었다. 현대적이며 한산한 거리 풍경에서, 17세기 양식을 모방한 건물들이 빽빽하게 늘어진 모습으로.

반 고흐 미술관 및 국립미술관이 모여있는 광장에 내렸다. 광장 내 마스크 없는 시원한 얼굴을 한 사람들의 분주한 걸음은 지금은 당연한 일상이지만 그 당시엔 볼 때마다 반가웠다. 아쉽게도 나름의 명물이며 이후에 복귀한 I amsterdam 표지판이 그때는 철거된 상태였다.



과거를 닮고 싶은 현대의 건물
다시 보기 힘들 한적한 국립미술관



어디에도 매표소가 보이지 않아서 헤매다가, 주변 관광객들이 핸드폰으로 입장하는 걸 보고 인터넷 발권으로 들어갔다. 미술관 내부는 4월 초의 일요일임에도 한산했다. 아직 나라 간 이동이 완전히 트이진 않았다. 유럽의 박물관 어디에서나 필수로 거쳐야 하는 라커룸에서 가방을 맡겼다. 수납원 중에는 근세 시대 배경의 그림이나 영화에서 나온 듯한, 장발의 곱슬머리를 한 남성 직원이 있었다. 직원이 장소에 역사성을 더했다.


처음 들어간 전시실은 17~18세기 세계 해양 무역의 선두주자 시절의 선박과 관련 물품으로 채워져 있었다. 먼나라 이웃나라 및 각종 게임의 영향이었는지 초등학교 시기엔 범선에 꽤 끌렸다. 아마 그 나이대에 암스테르담에 와서 이 박물관을 왔다면 내 삶은 또 다른 방향으로 갔을지도 모른다. 돛을 활짝 펼친 채 바람을 그득하게 받으며 머나먼 바다 어딘가로 떠나는 범선은 언제나 초중 시절의 상상력을 채웠다.


같은 층의 중세 전시관으로 가자, 어두운 천장 아래 기묘한 조각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사벨라 드 부르봉, 1400년대 중반 부르고뉴 공작부인의 무덤을 지키던 ‘흐느끼는 자들’.

서른이 되기도 전에 요절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서였을지. 가문의 위세를 떨치기 위한 것이었을지. 어느 쪽이든 당대 프랑스 핵심 영지의 공작부인 정도 되니 이만큼의 정교함이 더해졌겠지. 그 딸인 마리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막시밀리안 1세와 결혼하고, 막시밀리안 1세의 손자가 통합 합스부르크 제국 첫 군주인 카를 5세(카를로스 1세)였다. 이후 여정에서 보게 될 스페인 왕실과도 관련 있는 사람이었다.


국립미술관의 중심, 네덜란드 황금기 작품들이 모여있는 2층 명예의 전당으로 올라갔다. 높은 층고를 시원한 아치 기둥이 지탱하고 있었고, 그 사이 공간은 종교 성화와도 같은 그림들이 채웠다. 기둥과 보, 아치 모두에 화려한 꽃무늬와 기하학적 장식이 줄지었고, 금박까지 입혀져 있었다. 이 시기의 예술, 아니 이 시대 자체에 대한 이 나라 사람들의 마음이란. 이름에 걸맞은 공간이었다.

벽면은 어두운 톤의 짙은 청회색이었다. 그와 대비되는 황금 시기 인물들의 초상화가 넓은 벽면을 군데군데 차지했다. 낙농업이 발달한 풍요로운 땅에서, 해상 무역에서 벌어들인 부를 통해 빵과 우유, 치즈와 고기를 양껏 먹었을 사람들. 그 얼굴들에는 살과 자신감 모두 가득 차 있었다.

성스러운 전시실 중앙 끝엔 유일하게 제대로 아는 화가인 렘브란트의 야경꾼이 자리했다. 강렬한 명암의 대비가 특징인 그림이건만 보호 유리에 비친 창문 빛이 그림 속 어둠을 흩트렸다. 빛이라고 마냥 좋은 건 아니었다.




미술관을 만들어낸 주역들
(고위 귀족부인의 죽음에 대해) 흐느끼는 자들
얼굴 살과 자신감은 비례했다.
그림의 어두운 정중앙을 밝게 비춰준 창 빛
겨울의풍요.jpg 한겨울의 안식


유럽의 미술관이 처음은 아니었기에 그 외의 풍경화나 인물화는 주마간산 격으로 훑으며 지나쳤다.


그 와중에 한 작품이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황금 시기의 국가적 영웅, 미힐 드 로이테르 제독의 테라코타 두상이었다.

한국의 이순신에 비견되는 영웅인 만큼 근엄한 모습만 예상했지만 실제는 의외였다. 두상은 처음 봤을 때 데스마스크인 줄 알았다. 고통을 느끼는 듯한 일그러진 얼굴의 조각상이 있는 그대로 놓여 있었다. 단지 인간적 면모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몇 백 년이 지난 후대에도 그의 마지막 비극을 알리려 했던 것일까. 그는 자신이 속한 집단과 지키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모든 걸 헌신하며 삶을 불태웠다. 그리고 마지막에 돌아온 것은 국왕의 견제와 사실상의 추방, 그리고 의도된 전사(戰死)뿐이었다.

로이테르 두상과 초상화 앞에서, 나는 렘브란트 전시실보다도 더 오래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미힐 드 로이테르. 근엄한 초상화와 고통스러워하는 두상.



그 후 18세기 전시실로 내려갔다. 화려한 로코코 양식의 예술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다른 유럽의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도 익숙한 것들이었다. 앞서 본 황금기 네덜란드만의 고유한 느낌은 사라진 데다, 로이테르의 잔향이 여전히 머리에 남아있는 터였다. 몇몇 작품만 사진을 찍고 떠났다.

라커룸 쪽의 카페에서 8유로에 쿠키를 곁들인 커피를 마시며 잠시 앉아 쉰 후, 한 층을 올라가 19세기 미술실로 들어갔다. 네덜란드 풍경화를 제외하면 그곳의 그림들 역시 보편적인 ‘유럽의 그림들’의 연장으로 보였다.


'네덜란드'
개방감이 좋았던 중앙 홀



미술관을 나오자 어느덧 해는 중천을 넘어 서쪽으로 조금 넘어가 있었다. 원래 계획은 반 고흐 미술관도 가는 것이었지만, 6시간에 가까운 관람으로 인해 머리는 이미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국립미술관에서 나온 시각은 오후 3시, 쾰른으로 돌아가는 위트레흐트발 국제열차는 저녁 7시. 시간과 정신이 빠듯했기에 반 고흐는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오후 햇살을 등 뒤로 받으며 구도심 쪽으로 걸어갔다.


가는 길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자전거를 탄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높이는 같지만 양식은 다양한 건물들이 늘어선 거리를 걸었다. 17세기 전통 양식의 건물부터, 독일에서 자주 본 평지붕의 직사각형 건물, 심지어 일본 주택가 맨션을 닮은 세대마다 발코니가 튀어나온 건물도 있었다. 차분히 흐르는 운하를 옆에 두고, 전날 역사 지구의 활기와는 다른, 암스테르담 시민들의 한적한 오후를 함께 했다.





암스테르담 중앙역으로 가는 길에 안네 프랑크의 집에 들렀다. 사전 인터넷 예약을 해야 하는 데다 시간도 빠듯해서 관람은 불가능했지만 겉모습이라도 보려 했다. 저층부를 철판으로 덧댄 것 외엔 다른 집들과 구분되지 않는 건물이었다. 안을 보지 않으니 밖은 무의미했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핸드폰 배터리가 슬슬 주의 수준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또다시 어딘가 들려서 충전을 할 수도 없었기에 보조 배터리를 사야 했다. 핸드폰 수리점을 찾는 건 쉬웠다. 직원은 10000mAh 배터리를 먼저 제시하고 40유로를 불렀다. 부담이었기에 절반 용량을 찾았다. 한국에서 만원 내외로 살 수 있는 중국산 5000mAh 배터리의 가격마저도 23유로, 3만 원이 넘었다. 쓰렸지만 별수가 없었다. 계산할 때 직원은 활짝 웃었다. 전날 카페 주인의 은근한 미소와는 결이 달랐다.


암스테르담에서 위트레흐트까지 가는 열차는 수시로 있는 데다 30분이 채 걸리지 않기에 좀 더 주변을 둘러봤다. 거대한 치즈 덩어리들이 진열장을 빼곡히 채운 가게 앞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그 옆의 전자기기점 유리 너머로 본 K-pop 문구와 한국 연예인 영상, 태극기가 의외면서도 반가웠다.

원래의 당일치기 계획이 1박 2일로 늘었음에도, 도시를 떠나야 하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옅은 구름이 낮게 낀 암스테르담의 하늘은 빛나게 푸르렀다.



치즈와 K POP
아쉬움을 남긴 채 향했던 암스테르담 중앙역



오후 5시가 되기 전에 중앙역 앞 광장에 이르렀다. 경험 상 타국에서의 이동 스케줄은 시간표보다 여유 있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 역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가벼워 보였다. 그늘로 덮인 광장의 공기는 서늘하면서도 상쾌했다. 몇 번의 사진을 더 찍고 마침내 역사로 들어갔다. 위트레흐트로 가는 NS 열차를 타기 위해.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한 건 플랫폼에 올라온 직후였다. 타고 내리는 승객들로 북적여야 할 승강장이, 수도의 중앙역 플랫폼이 휑했다. 열차 역시 거의 보이지 않았다. 몇몇 사람들의 웅성거림만 눈에 띄었다.

유럽에서 네덜란드는 특히 영어가 가장 잘 통하기에 몇몇 고유명사를 제외하곤 네덜란드어를 익힐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 날 전광판을 보자 평생 잊지 못할 네덜란드어 단어가 들어왔다. 모든 행선지 밑에 동일한 단어가 반복되어 있었다.


rijdt niet


의미를 알기 위해 번역기를 굳이 쓸 필요가 없었다. 친절하게도 바로 영어 표기가 나왔다. 역시 모든 행선지 밑에 동일하게.


cancelled


몇 분간 서 있다가 주변을 둘러봤다. 네덜란드는 인도가 아니었다. 이 쾌적하고 현대적인 나라의 수도에서 모든 열차가 운행중지라는 건 있을 법하지 않았다.


몇 분이 더 흐르고, 뉴스 검색과 승객들의 움직임을 보고서야 상황을 이해했다.


‘NS 전산망 오류로 모든 도시 간 (Intercity) 열차 운행 중단. 밤늦게 복구 예정’



위트레흐트까진 더 이상 가깝지 않았다.

백팩을 제외한 모든 짐은 독일 쾰른의 호텔에 있었다.

도시의 하늘은 여전히 파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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