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5일, 7일 차 기록
아침에 일어난 직후 근처 마트로 끼니를 사러 갔다. 전날 예약할 때 뮌헨 호텔 숙박비는 조식 포함 여부에 따라 20유로 가까이 차이가 났었다. 며칠간 길바닥에 몇 백 유로를 날린 처지에 아침 식사로 2만 원이 넘는 호사를 누릴 순 없었다.
독일의 마트에선 뭐든 저렴하고 종류가 많은 것에 놀라곤 했는데 이날도 마찬가지였다. Rewe 마트의 베이커리 코너는 이래도 되는 걸까 싶을 정도로 빵값이 쌌다. 소시지와 과일도 마찬가지. 곧바로 출발 예정이기에 한가득 사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즉석식품 코너엔 Donburi Yakitori Hühnchen(닭꼬치 닭고기 덮밥)이라는 친숙한 중복 단어 조합이 보였다. 열차 이동시간만 환승 포함 7시간이 넘을 예정이었다. 빵과 과일, 요구르트, 초콜릿, 그리고 닭고기덮밥까지 결국 20유로 넘게 들었다.
방 안에서 동서양의 메뉴가 결합한 풍성한 조식을 즐긴 뒤, 오전 9시 20분쯤 바로 뮌헨 중앙역으로 이동했다. 탑승 후 전날 발권한 열차표에 적힌 예약석으로 갔다. 내 환승 목적지인 베로나 포르타 누오바역까지의 일정이 종이에 인쇄되어 좌석 위 선반에 꽂혀 있었다. DB의 오랜 명성과는 달리, 열차는 단 10분 정도만 지연 후 출발했다.
마침 전날 일정 변경을 요청했던 호텔에서는 하루 늦춰 변경이 가능하다고 친절한 이메일 답장을 보내왔다. 2박 예약한 호텔비는 보전하게 된 셈이었다.
오랜만에 순조로운 출발이었다. 창밖으로 펼쳐진 초봄의 오전 풍경을 여유롭게 바라볼 수 있었다.
출발 후 한 시간 정도가 지날 무렵, 평원과 완만한 구릉이 끝나고 점차 험준한 산이 보이기 시작했다. 열차는 국경을 넘어 오스트리아 영내로 진입했다. 쿠프슈타인 역에 정차하자 오스트리아 직원들이 탑승했다. 백팩을 멘 긴 머리의 여성 직원이 내 자리로 다가왔다. 여권까지 보여줘야 하나 싶었지만 단지 표만 검사했다. 목적지를 보더니 나에게 바로 물었다.
“EU PLF엔 등록한 거죠?”
생전 처음 듣는 단어였다.
“그게 뭔가요? ”
직원은 무표정으로 답했다.
“이탈리아는 코로나 방역 지침에 따라 PLF 등록을 해야 들어갈 수 있어요.”
어쩐 일로 잘 풀린다 싶었다. 당황해서 물었다.
“전혀 몰랐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핸드폰으로 바로 등록할 수 있어요. 가능한 미리 해두세요”
그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바로 폰을 켰다.
그 모습을 보더니 직원은 한마디 더 했다.
“그리고 베로나역에선...”
PLF 등록에 정신이 팔려 그 뒷부분은 제대로 듣지 못했다. “Ah yes... Danke”라고 답했고 그 후 직원은 다른 승객들에게 갔다.
잠깐의 긴장이 끝나자 다시 여행자의 여유가 되돌아왔다. 열차는 구불구불한 산악 노선을 따라 인스브루크로 들어갔다. 아기자기한 마을을 그 너머의 눈 덮인 거대한 산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알프스는 스위스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열차표 값에 쓴 80유로를 제대로 보상받는 기분에 사진과 함께 A에게 자랑했다
‘난 지금 유럽에서 가장 평화로운 지역에 있어’
‘어디길래?’
‘인스브루크’
이 말이 그녀의 뭔가를 자극한 거 같았다. 아마도 퇴근 직후였을 A는 이탈리아 알프스에 대한 열변을 라인으로 전달하기 시작했다.
‘볼차노가 더 좋아! 알프스에서 최고의 지역은 볼차노거든. 스위스나 오스트리아의 다른 알프스 지역보다 훨씬 나아. 국경을 지나면 어떻게 산들이 예뻐지는지 보게 될 거야.’
A가 갑자기 애국자가 된 건지, 진짜로 그런 건지는 두고 볼 일이었다.
인스브루크를 지나자 계곡은 점점 좁아지고 산은 높아졌다. 열차가 움직임에 따라 계절이 빠르게 바뀌었다. 흐리다가도 햇살이 비치고, 눈 덮인 뾰족한 봉우리가 나왔다가 눈 녹은 둥그런 언덕이 나오길 반복했다. 핸드폰 카메라와 별도로 챙긴 디지털카메라로 번갈아 가며 찍느라 쉴 수가 없었다.
열차가 이탈리아 영내로 들어서자 브레너에서 예상대로 직원들이 탑승해 검표 및 PLF 확인을 했다. 미리 준비한 터라 검문은 금방 끝났고, 그 후 잠깐 잠에 빠져들었다.
눈을 뜨자 창밖이 바뀌었다. 익숙한 느낌의 연한 푸른 하늘 아래 봄볕이 내리쬐고, 활엽수들엔 연두색 잎사귀가 돋아나고 있었다.
열차는 볼차노에 이르렀다.
넓게 펼쳐진 포도밭 너머로, 오스트리아 알프스에선 보지 못한 이질적인 수직의 바위 절벽이 거대한 요새처럼 자리했다. 그 나름 장관이긴 했지만 돌로미티가 알프스에서 최고인지는 의문이 들었다. 역시나 A의 애국심이 강한 것으로 결론 내렸다.
햇살 아래 돌로미티의 기암괴석을 구경하다 보니 어느덧 한 시간이 더 흘렀고, 오후 3시 무렵 베로나에 도착했다. 여기서 EC 국제열차에서 내려 이탈리아 지역 노선인 RE 열차로 갈아타야 했다. 문득 오스트리아 직원의 베로나에서 뭔가 하라는 조언이 떠올랐지만 뒷 내용을 잘 듣지 못했었다. 별 문제가 없을 거라 마음 놓았다. 20분 간의 환승 대기 시간 동안 역 앞 광장을 둘러보고 과일 컵과 베로나 지역 마그넷을 하나 샀다.
그 후 Trenitalia가 운영하는 RE 열차에 탑승했다. 좌석부터 천장까지, 디자인과 색감 모두 독일 열차보다 더 세련되고 깔끔했다. 앉은자리 맞은편 틈새로 보이는 여성의 선글라스는 꽤 잘 어울렸다. 열차와 사람 모두 이탈리아였다.
출발 후 10여 분이 지났을 때 검표 요원들이 차량 내로 들어와 한 명 한 명 인사를 하며 표 확인을 시작했다. 모자를 쓰고 턱수염이 풍성한 큰 체구의 남성 직원은 부드러운 어조로 Buongiorno인사와 함께 표를 확인하고 다녔다. 그간 접한 매체에서 대부분 본죠르노의 ‘죠’에 강세를 두는 것과 달리, 이 검표 요원은 마지막 부분에서 억양을 올리는, ‘본죠르↗노’로 발음했다. 중독성이 있어서 나도 모르게 따라서 읊었다.
내 차례가 왔다. 뮌헨역에서 발권한 타임테이블과 열차표를 보여줬다. 직원은 표를 보더니 표정이 바뀌었다. 의혹이 가득한 얼굴로 나에게 물었다.
“이게 전부인가요?”
80유로를 내고 산, 베로나 환승 후 노선까지 적힌 표였다. 당당했다.
“네. 뮌헨에서 환승 포함해서 한 번에 결제한 표예요. 여기 목적지 나와 있잖아요.”
직원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표를 돌려주고는 확인해 보겠다며 다른 칸으로 이동했다.
표를 다시 보니 영어 없이 독일어로만 적혀있었다.
분명 출발지와 목적지가 적혀있는데 뭐가 문제지? 그 순간 오스트리아 직원의 말이 떠올랐다. 설마 그 직원이 말한 ‘베로나에서...’가 이 표를 제시하고 RE 표를 새로 발권하라는 뜻이었을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다시 긴장감이 올라왔다.
분명 돈을 냈는데 무임승차, 아니 무표승차가 되는 건지. 벌금을 내야 하는 건지 추가 요금을 내야 하는 건지. 전전날 택시비와 전날 비행기표에 이어, 이날 열차표로 돈을 또 날리면 삼관왕을 달성하는 셈이었다.
잠시 뒤, 본죠르노를 말하지 않는 다른 직원이 오더니 다시 내 표를 확인했다. 무표정에 아무 말이 없기에 나 역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직원은 다시 표를 돌려주고 떠나더니 그 뒤로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그걸로 끝이었다.
열차는 목적지까지 계속 이동했다.
그 사이 비어 있던 맞은편 자리엔 관광객 차림의 두 중국인 여성이 앉았다.
한 시간 정도가 지나 오후 5시 무렵, 평화로운 평원과 마을의 오후 풍경을 바라보던 중 멀리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두 여성 중 한 명이 흥분한 목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웨이니스 따오러! 웨이니스 따오러!”
威尼斯到了! 威尼斯到了!
(베니스에 왔어! 베니스에 왔어!)
북해의 암스테르담에서 시작해 3일간 열차로만 총 16시간.
강을 건너고 들판을 가로지른 뒤 산을 넘어 도착했다.
바다를 딛고 만든 최고의 응접실,
산 마르코 광장이 있는 도시.
베네치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