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적인 선택이란 없다.
네가 지금 선택한 그것이 바로 니 인생.
내가 입사를 선택한 곳은 잘 빠진 서울내기 느낌의 'S' 그룹의 한 IT 회사였다.
회사와의 첫 대면인 면접에서부터 새로운 경험의 연속이었다.
'정장' 이 아닌 '비즈니스 캐주얼'을 입고 오라던 면접 장소는 호텔이었다. 면접을 보고 근사한 코스 요리를 먹었다. 호텔에서 밥을 먹은 것은 처음이었다. 합격자 발표 후, 회사에서는 이벤트를 만들어서 합격자들을 자주 모았다. 술을 사주고, 1박 2일 스키장을 보내주고 그랬다. 다른 회사로의 이탈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법인카드를 쥐고 있는 인사팀 선배야 좌불안석이었겠지만, 나는 술을 좋아했고, 공짜 술은 유달리 달았다. 호텔도 그랬지만 콘도도 스키장도 처음이었다. 어렸을 때는 지방의 외갓집 갔던 적 말고는 여행이라고 할 만한 기억이 없다. 여행을 다닐 만큼 화목하지도 여유롭지도 않았다. 스물이 넘어 다니던 여행의 숙소는 항상 민박집이었다. 합격자가 되더니 갑자기 신분이 상승한 것처럼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신나고 즐거워야 마땅했던 그때, 내내 마음 한편이 불편했다. 지금이야 '스키장에 가는 건 내 취향이 아니야.'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때는 취향인지 아닌지 알 수도 없었다. 경험을 해보지 않은 것에 대해 호불호를 말할 수는 없는 법. 짬뽕과 짜장면만 먹어본 사람이 팔보채냐 양장피냐에 취향이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어떤 취향은 지극히 계급적이다. 추운 날 뚱뚱한 스키복을 입고 무거운 보드를 들고 불편한 신발을 신고 볼살을 에이는 리프트를 타고 올라갔다. 위태위태하게 몇 번을 구르며 내려왔다. 내려오는 순간의 해방감이 있었지만, 불편함을 이기지 못했다. 상급자 코스의 슬로프를 멋지게 가르며 내려와 활짝 웃는 몇 명의 동기들을 보면서 (생각해보면 정말 소수였는데) 거리감을 느꼈다. 회사에서 만난 동기들은 좋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에게 정말로 부러웠던 건 긍정적이고 건강한 애티튜드였는데, 그것은 (경제적인 것을 포함한) 여러 가지 여유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는 없는.
사실 그때 마음을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불편함보다는 초조함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경험의 결핍에서 드러나는 가난의 그림자를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 늘 마음이 쫓기던 내가 가질 수 없었던, 그렇지만 동경하는 삶의 태도를 가진 사람들과 앞으로 함께 지내야 한다는 압박감. 성공에 대한 욕망은 없었지만 인정 욕구는 컸던 내가 더 이상 스스로를 속일 수 없을 것 같다는 본능적인 직감. 뭐 그런 게 있었다. 가고 싶어서 선택한 곳도 아니면서, 그럼에도 붙여만 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었던 마음과 별개로, 그때의 나는 모든 게 너무나 복잡했다. 스물몇의 나이는 미치도록 어린 나이였고, 그때가 모든 것이 시작이어도 좋을 나이였는데, 그때는 지금보다 더 꼰대 같고, 더 늙어있었다.
그래도 유명한 쇼를 보며 저녁을 먹고, 하룻밤을 호텔에서 지내는 일정으로 진행된 부모님 초청행사를 치르면서 어쩐지 효도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새해가 되고 드디어 신입사원이 되었다. 삐딱한 마음을 품고 그룹 연수에 갔다. 모 기업은 대규모 카드섹션도 한다지만, 다행히 그런 건 없었다. 그룹 연수 기간은 신입사원들에게 그룹의 역사를 가르치고 그룹의 경영방침을 공유하는(세뇌하는) 시간이었다. 2~3주 동안(기억이 가물가물) 조별로 미션을 수행하거나 봉사활동을 하고, 여러 가지 교육을 들었다. 직장인으로서의 기본 애티튜드를 세팅하는 기간이었던 게다. 가장 중점을 두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싶어 했던 건 그룹의 경영철학이었는데, 내가 속한 S 그룹은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행복"이 가장 중요하고 가르쳤었다. 그러나 쭈구리 안티 마인드였던 나는 기업의 존재 이유도 행복이라며 한참 교육을 하던 어떤 부장님에게 "기업의 생존 목적은 행복이 아니라 이윤추구 아닌가요?"(십여 년 전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소심한 쩌리인 내가 이렇게 도발적으로 물어봤을 리는 없다. 다만 저런 식의 질문을 하기는 했었다.)라고 질문을 던졌고, 부장님은 못 들은 척 헛기침을 하고 지나가셨다. 교육이 끝나고 강의실에 있던 선배 사원이 조용히 다가와 이상한 질문은 하지 말라고 조언 아닌 조언을 했었다. 사실 그건 딴지였다. 기업은 이윤이 최고로 많이 나면 행복한 게 당연한 거 아닌가? 그걸 이윤추구가 아니라 행복추구라고 좀 포장한들 뭐가 그리 문제가 있겠는가. 물론 표면적으로나마 < 우리의 존재 이유는 단순한 이윤 추구가 아니라 "너, 나 우리의 행복추구(물론 돈을 벌어야 내가 너 월급도 주고 너도 행복하고 나도 행복하지..) "란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훨씬 soft 한 기업문화를 만드는데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은 한참이 지나서야 알았지만..... 그룹 연수에서 만난 조원들도 좋은 사람들이었다. 나만 쭈구리 같이 느껴지고, 그 쭈구리인 게 티가 날까 마음이 불편했다.
그룹 연수가 끝나고 그다음 순서는 회사 자체 연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신입일 때는 지리산 등반 일정이 있었다. 그즈음 우리 회사뿐만 많은 회사들에서 신입사원을 대상으로 병영체험 같은 힘든(?) 연수를 하는 게 유행이었다. 등산을 좋아하지도 않거니와 너무 힘들었다. 일부러 힘든 일정을 소화하게 하는 건 동기들끼리 으샤 으샤 하면서 친목도 도모하고, 정신 무장도 하고, 소속감도 키우기 위한 목적일 것이다. 그런 방식의 교육에 동의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외부의 적이 있으면 내부 구성원들 사이에 끈끈함이 생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조직의 원리다. 그런데 나는 그 산이 그렇게 오르기 싫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기도 싫었고, 폐가 되는 것도 싫었다. 부상자는 중간에 등반을 포기할 수 있었는데, 부상자 대열에 자발적으로 들어갔다. 옆에서 버티던 동기 몇 명도 내 선동에 말려 같이 내려가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같이 올라가던 동기들에게는 그런 행동이 민폐였을텐데, 그땐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때 나에게 회사는 고등학생 이후 대학생이 된 것처럼, 그저 다음 코스였다. 졸업생 백수만 되지 안 않으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아침에 출근하고, (무엇인지 모르지만) 일을 하고 저녁에 퇴근을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때 생각에 첫 번째 직장은 "임시 정거장"이었다. 내가 아직 어디로 가야 할지, 어디로 가고 싶은지 모르는데, 아무 버스나 탈 수는 없으니, 잠시 멈춰서 내가 탈 버스를 정할 때까지 비도 피하고, 더위도 피하는 그런 임시 정거장. 그래서 입사하고 나서 한참을 무슨 버스를 탈지 고르고 다녔더랬다. 내가 정거장에 서 있는 게 아니라, 아무 버스나 집어탔음을 깨달은 것은 아주 한참 후였다.
( 그 시절을 정리하고 보니, 누군가는 절실히 원하던 곳이었을 텐데 그즈음의 나는 참 철없고 재수 없는 젊은이였다. 그러나 이미 그랬던 거 이제 와서 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