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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오페이퍼 Aug 20. 2020

회사를 고른 기준

그것은 바로 선착순


행정고시 2차 시험은  여름이었다.

시험이 끝나면 떨어질 경우를 생각해 시험을 한번 더 볼지 취업을 준비할지 결정을 해야 한다.


1년의 재수. 2년의 휴학.

지금 생각하면 새파랗게 어린 나이지만 그땐 조바심이 있었다. 이대로 시험도 떨어지고 취업도 못할까 봐.

애초에 공무원에 대한 큰 뜻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고시공부를 한다며 신림동에 방을 얻고 공식적으로 집에서 나갈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나도 엄마도 상처 받지 않고 거리를 둘 수 있는 수단. 과외로 모아두었던 돈은 진작 바닥이 나버렸고 나의 욕망인지 부모님의 욕망인지 모를 공무원 시험에 대한 더 이상의 가족의 지원은 부담스러웠다.  타인의 희생을 담보로 한 수험 생활은 내내 가시방석이었다.  돈을 벌고 싶었다. 때마침 동생도 제대하고. 핑계가 좋았다. 그렇게 취업 준비를 시작했다.


고등학교 시절 성실성의 대가인 학벌 외엔  공모전,  인턴경험, 자격증, 아무것도 없었다.

730점이라는 토익점수와 77 사이즈의 옷도 들어가지 않는 몸무게 밖엔. ( 면접을 보려면 정장을 입어야...)


    무엇을 하고 싶은지 고민하고 부딪치고 경험을 했어야 하는 시기를,  창문 없는 고시원에서 보내고 나니 내가 무얼 하고 싶은지, 무얼 할 수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선택하고 써버린 시간인데 어쩐지 실수를 한 것만 같아 마음은 급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전형적인 입시교육 폐해의 상징이라고 할까?


   닥치는 대로 원서를 넣었다.  일단 취직을 하고 그다음 생각을 하자고 생각했다.  입사원서를 쓰면서 하루에 4시간씩 운동을 했다. 2달 만에 12kg을 감량하고 드디어 면접 복장의 옷에 몸이 맞겠다 싶을 무렵,  시원하게 수십 개의 서류 광탈 끝에 4군데 면접 기회를 얻었다. IT 회사,  광고회사, 건설기계회사, 증권사.  나에게 면접을 보러 오라고 한 회사들도 참 맥락이 없다. 그러나 어차피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다. 하고 싶은 일은 없었지만  막연하게 기획팀이나 회계팀에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입사해서 원하는 팀을 물으면 "회계팀이요"라고 할 작정이었다. (누가 뽑아준 것도 아닌데. )  그나마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복식부기의 8원리였으고, 나는 딱 떨어지는 분개에 호감이 있는 사람이니까.  어느 곳이나 무차별할 때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선착순이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회사는 가장 먼저 최종 합격 문자를 준 곳이었다.


사실 마지막까지 고민했던 회사가 하나 있긴 했다. 본사 위치, 연봉, 전망 등을 생각했을 때 지금 선택한 회사보다 좋았다. 면접 때 인사팀에서 좋게 봤는지 최종면접 전에 따로 불러 점심을 사주시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 회사를 접은 이유는 면접 당시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임원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 어차피  관둘 여자들이 왜 이렇게 많아?!"


    아들을 낳고 싶었던 엄마의 소망 덕분에 얼렁뚱땅 태어나버린 세 번째 딸이지만, 자라면서 남동생을 위해 희생을 했던 적은 없었다. 남동생에 대한 엄마의 과도한 애정은 오랜 바람 끝에 이룬 소망에 대한 기쁨이었을 뿐,  엄마는 "넌 여자니까 못할 거야"라는 메시지를 준 적은 없었다. 어렸을 적에 할머니가 "계집애들은 중학교만 졸업하고 공장 가서 돈을 벌어야지 공부를 왜 시켜?"라고 잔소리를 해댔지만  그건 그저 할머니의 여러 가지 시집살이 스킬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왜냐면 고모의 등록금을 내어놓으라고 거실에 누워 통곡을 할 땐, 여자도 배워야 한다고 했었으니까.


   그리고 비록 나는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를 졸업한 옛날 사람이지만, 남자 반장, 여자 반장을 따로 뽑는 시대를 보냈고, 학창 시절 만났던 수많은 자매들은 나보다 1~2년 앞서 시작한 사회생활을 너무나 잘하고 있었다. '이런 구시대적인 발상을 하는 사람이 있는 곳이라니!'  라며 최종 면접에 불참을 함으로써 나름의 항의를 했더랬다.  물론 나만 아는 항의...


    입사하고 나서 선배들에게 들은 썰에 의하면 대졸 여자를 대기업에서 제대로(?) 채용하기 시작한 게 2000년대 초반이었단다. 그리고 보니 학교 다닐 때도 '94학번에는 여자가 3명밖에 없대... 우리 과가 100명이 넘는데...'라는 이야기를 무슨 전설처럼 하기도 했었다. 회사에 있는 여자들은 대개 계약직 서무 여직원. 비서들이었고, 어쩌다 정직원으로 뽑힌 경우에도 임신을 하면 "언제 사표 낼 거야?"라는 말을 듣는 게 당연했던 시절이 불과 몇 년 전이었다고 하니 그 임원 입장에서는  낯선 풍경에서 나온 방어적 표현이었다고 애써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역시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지 못하는 것 같았던 그 회사는 현재 아주 싼 값에 매물로 나와있다고 하니, 싹수가 노랗다면 뿌리는 썩기 마련인 것인가?


"언니, 저 회사 이름이 생소한데 나 뭐하는 곳인지 알고 싶어. 한번 가봐라"

먼저 취직하고 본인 회사 리쿠르팅을 나온 과 후배가, 지금 내가 다니는 회사의 부스를 가리키며 미션을 주었더랬다.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가 회사 소개를 듣는데, 설명을 해주는 선배들의 표정이 참 좋았다. 그날 하루 꽤 여러 회사의 리쿠르팅 부스를 돌아다녔는데, 유일하게 그곳에서 만난 선배들에게서만 본인들이 속한 조직에 대한 애정이 있었다.  그땐 몰랐는데, 내가 이 회사를 선택한 이유는 그 선배들의 표정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  당연히 그 해 2차 시험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공채 합격을 축하한다며, 회사에서 합격자들을 불러 술을 사주는데 그 술을 마시다 시험 결과를 확인하고, 화장실에서 대성통곡을 했더랬다.  지금 생각하면 왕 재수다. 분명 그 회사 입사가 꿈이었던 사람들도 있었을텐데 다른 곳에 탈락했다고 울고 있는 꼴이라니. 그럼에도  나를  다정히 위로해주던 입사 동기 언니의 토닥임이 아직도 기억난다.  


지나간 시간을 돌이켜 생각해보니

월급을 받고자 직장인이 되었지만, 아무래도 지금까지 계속 조직에 남아있는 건 월급 때문만이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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