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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오페이퍼 May 24. 2021

부적과 인라인

너의 트랙을 응원하며

고3 때 웬 스님이 집으로 와서 내 머리에 손을 대고 염불을 한 적이 있다.  원래도 기복신앙 같은 엄마의 종교생활이 싫었지만 그 날은 정말 엄마에게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던 것 같다.  엄마가 이런 걸 한다고 내가 공부를 더 잘하게 되겠냐고 충분히 잘하고 있지 않냐고.  엄마가 나를 믿지 못해서 그런다고 생각해 절망스러웠다.  왜 다른 엄마들처럼  " 엄마는 널 믿어"라고 하지 못할까 원망했었다.


십 년쯤 지나 서른 언저리가 돼서야

그게 비로소 엄마의 불안 때문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를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라

본인의 인생에  더 이상 불행이 닥쳐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그 후로 엄마가 매년 지갑에 넣어주는 새 부적을 곱게 받았다. 그게 효도라고 생각했었다. 나 정도면 참 좋은 딸이라고 생각하면서.


지난 주말 아이와 인라인을 타러 갔다.

평소에 이모님과 같이 배우러 다니기 때문에 나는 아이의 모습을 알지 못했고 이제  두 번 배운 아이는 나에게 자신의 성장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집 근처 체육공원의 인라인장은

인라인을 신은 사람만 들어갈 수 있었다. 나는 인라인 스케이트도 없고 인라인 타는 방법도 모른다.

트랙은 온전히 그녀의 공간.

나는 선 밖에서 아이를 기다려야 한다.

스케이트를 신은 아이는 아이는 서툰 몸짓으로 트랙을 향해 미끄러져 들어갔다.  나는 숨을 죽이고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비틀거리면서도 신중하게 발을 굴렀다.

앞으로 나아가다 뒤를 돌아보고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홈으로 돌아온 아이는 연신 자신의 성취를 자랑했다.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칭찬을 해주면서도  

아이의 성장이 대견하면서도  다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놓을 수 없었다.

아이는 계속 돌았다.

넘어지기도 하고 비틀거리기도 하고
또는 멍하니 서 있기도 하고
온 몸에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고 달리기도 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이가 나를 돌아봤을 때  실망하지 않도록
눈 맞춤하고 손을 흔들어 줄 수 있도록

아이를 계속 바라보는 것.
홈으로 돌아온  아이에게 시원한 물을 건네는 것.

아마도 아이는 자신을 바라보는 내가
무슨 생각하는지  무얼 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자신이 얼굴을 들어 고개를 돌렸을 때 내가 있으면 만족하고  홈에 들어왔을 때  엄마가 시원한 물을 건넬 것을 의심하지 않을 뿐이다.

트랙을 도는 그 조그마한 어깨를 보며 육아란
부모 자식이란 무릇 이런 관계구나 하고 감히  생각했다.

학교 간 사이 엄마의 시간이 궁금하지 않았던 나는

무엇을 해주어야 할지 몰라 부적을 받아와 내 지갑이 넣어주던 엄마의 마음이 이제야 조금  이해가 간다.

단지 본인의 불안함을 잠재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는 것 말이다.

(물론 그럼에도 여전히 부적은 싫다.)

트랙 밖에서 아이를 바라보는 마음은

무력함과 대견함, 아쉬움과 조바심.

그밖에 뭐라 이름 붙여야 할지 모를 감정들이었다.  


내 품의 아이는 이제 제 세상을 향해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여전히 화장실에 혼자 가는 것이 무섭고

밤에 엄마가 재워주지 않으면 세상 슬픈 아이지만

아이에겐 내가 들어갈 수 없는 저 인라인 트랙 같은

공간이 점점 더 늘어날 것이다.


과연 나는 그녀에게 어떤 홈이 되어줄 수 있을까.

내가  그렇게 외치던 "다른"  엄마가 될 수는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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