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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오페이퍼 Jul 21. 2024

'매직키'가 아닌 그냥 엄마되기

<엄마라는 이상한 세계> 를 읽고 

   회사를 다니며 아이를 열 살까지 키우는 내내  끈적하게 붙어있는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남편은 육아에 적극적이었고, 좋은 시터를 연달아 만났고, 회사는 육아를 해야 하는 환경에 (그때는/상대적으로) 호의적이었다. 아무도 직접적으로 대놓고 나에게 '이렇게 해야지~'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매 순간 혼란스러웠고, 흔들렸고, 마음이 부대꼈다. 해야한다고 생각되는 일들의 목록들은 서로 상충되기 일쑤였다. 출근을 해야 하는데 어린이집 가기 싫다고 우는 아이를 잡고 대성통곡하고, 육아와 살림에 적극적이지만 주양육자의 포지션이 무엇인지 감을 잡지 못하는 남편과 자주 다투었다. 야근을 하거나 회식을 할 때에는 아이에게 미안했고, 아이 때문에 일을 두고 집에 달려올 땐 무능력한 직장인이 된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폭발하지 않기 위해 시간을 쪼개 책을 읽고 독서모임을 했고 다행스럽게도 그 안에서 끈적한 죄책감의 실체가 무엇인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안다고 해도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시터 없이 혼자 다니기 시작한 9살의 아이는 자주 전화를 걸었다. 회의시간을 아무리 피해 잡아도 결국엔 겹치고 마는 순간들.  '죄송합니다.' 를 입에 달고서,  5분만, 3분만 더 통화하자는 아이에게 끊으라고 다그쳤다. 아이의 하루는 돌봄과 학원을 빽빽하게 채웠졌다. 그즈음 아이는 자주 "엄마 나 사랑해?"를 물었고, 가끔은 "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나 봐. 나 때문에 엄마도 힘들고. 사람 든 다 죽는데 왜 태어나는 거야?"라는 혼잣말을 했다. 열 살 아이의 입에서 "죽고 싶어"라는 말을 듣던 날, "사람들은 모두 죽어. 근데 태어났으니 그냥 살자"라고 별 일 아닌 것처럼 대답하고 잠을 설쳤다. 외롭다는 말이었겠지만, 8번째 생일을 막 넘긴 아이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순간이었나보다. 아이의 말은 회사에서의 번아웃을 부추겼다. 퇴사를 결심했고, 결과적으로 휴직을 한 상태다. 


  아이는 여러 면에서 많이 달라졌다. 언제나 가까운 곳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이 아이에게 주는 안정감이 눈에 띄게 보였다. 시간이 생기면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리라 생각했는데, 아이가 학교간 사이에 도서관 수업을 찾아보고, 아이 문제집을 검색했다. 편식하는 아이에게 하나라도 더 먹이기 위해 부엌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집에있는 엄마라면 응당 해야 하는 일들이라고 생각되는 (이런건 어디서 학습한거니?) 것들을  할일 목록에 올리고 있었다. 어떤 성과를 내기 위해 시간을 만든 게 아닌데, 이 1년에 무엇인가 특별한 것을 해야하는 건 아닐까 싶은 불안감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또 그것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런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았으니까? (도대체 그런 엄마는 또뭔대?) 나는 쉬고 싶었고, 아이가 원할 때 손을 잡아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을 뿐인데, 왜 새로운 과제에 직면한 느낌이지 라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때 쯤 이 책이 집에 도착했다. 


"엄마라는 이상한 세계"   
http://aladin.kr/p/5RtuA


이설기는 나에게 쓸이었다.  4년정도 함께 했던 공부모임 '트러블'의 쓸. 단정하고 다정한데 날카로운 글을 쓰던 쓸이 출판사에 투고했다면서 보내준 원고를 읽었었다. 이미 초고부터 재미있었지만, 실은 열살 아이이를 키우는 내게 크게 유효한 이야기는 아닐 수도 있겠다 생각했었다. 그.러.나. 초고와 달라진, 문제의식이 선명하게 드러난 이 책은 지금 나에게 완전 필요한 책이었다. 아이가 몇 살이냐가 중요한게 아니었다.서른이 넘은 딸이 집에 들어오지 않아도, 혹은 모태솔로여도 고민인게 엄마들의 마음 아니던가? 쓸은 엄마를 향해 쏟아지는 모순된 명령들이 아이의 나이와 상관없이 항상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책을 썼다.  오히려 혼란을 겪고 겪었던, 겪고 있는 앞으로도 겪을 쓸이 보였다. 거기서 끝나면 일기였겠지만, 쓸은 그런 개인적 상황들을 사회적으로 읽어내고 사유하고 글로 그려냈다. 그래서 책 속의 쓸은 나의 또 다른 모습이고, 엄마로 살아가고 있는 지인들의 모습이기도 했다. 


  작가는 29주에 조산을 했다.  작가가 자궁수축으로 입원을 해서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품에 안기도 전에 인큐베이터에 보내고, 자라는 내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여러 가지 가능성에 전전긍긍하며 아이를 키웠다. 작가에게 쏟아지던, 엄마를 겨냥한 정보와 조언과 지시들은 모슨 덩어리였다. 동시에 달성할 수 없는 것들, 예를 들면, 아이의 발달을 자극하기 위해 목적을 가지고 아이와 놀아주되, 그것이 아이에게는 그저 놀이로만 느껴지도록 할 것 같은 명령들. 너무나 익숙한데 잘 들여다보면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살을 빼기 위해 운동을 하되 그것이 운동임을 알리지 말라 같은? 작가는 그 시간 속에서 움추러들었다. 아이가 엄마 때문에 잘 자라지 못할 수도 있다는데 누가 그러지 않겠는가? 몇 달에 한번씩 행해지던 영유아 검사가 성적표 같던 기분을 모두가 느꼈을 것이다. 


작가는 지지 않았다. 오히려 맞서서 해석하고자 했다. 이 책은 그 과정을 지나온 작가의 흔적이다. 흔적이라는 말은 너무 소소하고 하나의 보고서다. 개인적인 경험담을 넘어서서, 자신 앞에 당도한 사회적 메시지를 받아들일 것인가 말것인가 라는 이분법에 휘말리지 않고, 그 메세지가 가지는 함의를 찾으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사회적 차원에서, 구조적 차원에서 '엄마'라는 역할에 씌여진 무거운 굴레를 담담하고 꼼꼼하게 기록한다. 아이의 장애 유무, 나이, 성별에 관계없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너무나 손쉽게 제시되는 상황들. 모든 문제의 매직키는 '엄마가~' 라는 말로 설명되었다. 


그러니 누구도 죄책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거다. 그 결과가 아마도 지금의 비출산일테고. 

이 책에서 가장 좋은건, 엄마가 가지는 죄책감의 구조적 원인을 파악하는데서 끝내거나 혹은 우리가 잘하고 있으니 죄책감에서 벗어나자고 하지 않는 것이다. 혼란을 혼란인 채로 두지 않고 정리하되, 섣불리 입장을 정하지 않은 채,  우리를 둘러싼 구조와 환경을 읽는 이에게 환기시켜 주고 있다. 이런 이야기들이,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구조와 명령 사이를 뚫고 나와서 다른 논의의 장이 펼쳐지기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작가의 기대에 대답할 수 있을까? 

세상이 나에게 매직키가 되라고 외치는데, 괜찮다고 나는 아니되겠노라고 할 수 있을까? 

일단 이 휴직 1년을 그 명령을 수행하는데 소진하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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