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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오페이퍼 Aug 13. 2024

No.2

<쉽게 읽는 주디스 버틀러> 1장 읽고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 여자 혹은 남자로 규정된다. 그러나 이분법적인 여/남 성별 구분은 얼마 전 올림픽에서 이슈가 되었던 간성(인터섹스 : 이슈가 된 그 선수의 경우 태어났을 때 여성으로 분류되고 여성으로 살아왔으나 성염색체는 XY인 경우다.)인을 배제한다. 버틀러에 따르면 몸은 고도로 젠더화된 규율도식의 생산적 규제 내에 구성되는 것이다. 버틀러는 섹스/젠더 체계를 역시 근대적인 이분법에 다를 바 없다고 비판하며, 섹스(=몸) 역시 젠더와 마찬가지로 구성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아니 그보다 젠더를 만드는 사회적 법과 규범의 효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급진적이다. 

 

여하튼 지금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 성별을 부여받는다. (성별이 생물학적인 것이든,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든) 프로이트의 분석에 따르면 사람들은 자신이 부여받은 성별과 동일한 성별인 부모와의 동일시를 통해 정상적인 성정체성을 획득한다. 그 동일시 과정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 동성애자가 된다. 이것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통해 프로이트가 주장하는 것이다. 여기서 누구와 동일시를 할 것인가는 개인의 욕망에 따라 결정된다. 그렇다면 자신의 욕망에 따라 결정한 동일시가 왜 정상/비정상으로 나눠지는 것인가?  프로이트는 근친상간금지라는 전제 때문이라고 보았고, 버틀러는 여기서 더 나아가 프로이트가 암묵적으로 이성애를 가정하고 있다는 점도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헤겔, 프로이트, 라깡은 개인들을 욕망의 주체라고 보았다. 욕망의 주체들이 행위로써의 동일시를 수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비정상성을 선택하는 이들은 왜 그런 방식으로 동일시를 선택하는가 라는 질문이 생긴다. 이에 대해 푸코는 욕망의 주체라는 개념을 거부한다. 이는 마치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는 거다. 푸코에게 이러한 주체는 허구다.  푸코에 따르면 주체의 몸은 욕망 때문에 형성되거나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부과한 진리를 기록하고 재기록하는 일종의 고대문서 같은 것(40쪽)이다.  맞다. 사실 개인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배스킨라빈스에 들어가서 아이스크림을 고르지만, 31개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버틀러는 이러한 푸코의 입장에 동의하며, 주체가 권력의 실천과 담론을 통해서 구성되어 그 지배를 받을 뿐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그에 묶여서 의존하는 상황을 일종의 ‘종속’ 형태(41쪽)라고 말한다. 푸코에게 주체는 담론 공간 내에게 훈육과 감시의 기술 및 작동에 의해 유지되는 유순한 신체다. 규범화가 종속을 가능하게 한다. 니체의 양심의 가책, 알튀세르의 호명도 이러한 종속이론을 설명해 준다. 여기서 버틀러는 이러한 이론들이 ‘주체 없는 정신의 문제(44쪽)’ 를 설명하지 못한다고 문제 제기한다. 푸코의 순응하는 신체 (docile body)는 포커스가 신체에 맞추어져 있다는 거다. 

 

구조가, 기술이 예속적 주체를 만드는 것은 알겠는데,  이게 어쩌면 이렇게 부드럽게 넘어가는 것인가?  자발적 복종!!!  버틀러는 <권력의 정신적 삶>에서 '정신'의 측면에서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주체의 형성을 설명한다.   푸코가 장소, 건축, 담론, 반복 지게와 같은 사회문화적 실체가 순응적인 몸으로서의 주체를 생산하는 것을 포착했다면, 버틀러는 주체의 내적작용(정신)을 설명하는 정신분석학을 통해 정신이 규제화 규범화를 촉진하는 것, 자기 자신이 복종할 조건을 원하는 현상을 설명하고자 한 것이다.  

 

동성애 금지와 근친상간금지로 금지당하는 욕망이 생긴다.  정답지는 주어져있다. 규범화된 욕망만을 선택지로 부여받은 주체이지만, 금지된 욕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버틀러는 프로이트의 상실로 인한 애도와 우울증 개념과 초자아(양심) 개념을 이용해서 자발적 복종을 설명한다. 금지된 욕망은 상실과 같다. 애도로 끝나지 않는 상실은 내면에 동일시된다. 이것이 우울증적 동일시다.  금지를 욕망하는 자아를 향해 비난하고 처벌하는 초자아를 형성한다.  초자아는 이제 자아를 지켜보는 내면의 눈이 된다. 이제 우울증적 동일시를 겪고 있는 자아와 처벌하려는 초자아로 분열된다.  초자아의 감시아래  주체는 규범에 따른 수행을 한다.  이 개념이 젠더수행성 개념으로 연결된다. 말 잘 듣는 착한 어린이.. 아니.. 어른. 

 

그리고 반복적인 젠더 수행 과정에서 주체는 필연적으로 삐끗하게 되는데, 버틀러는 이것을 저항의 지점으로 보았다. 고등학교 때 추운 겨울날 체육복을 치마 안에 입고 등교했다. 교문 앞에서 바지 밑단을 돌돌 접어 치마 밑으로 넣는다. 체육복이 보이지 않도록. 왜냐면 체육복을 입고 등교하지 말라는 교내 규칙이 있었으니까.  바지밑단을 접는 걸 선생님도 보고 있지만, 추운 것도 알아서 선생님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교문을 통과한 우리는 모두 다시 바지를 내렸다. 푸코가 고대 그리스 로마로 돌아가 그노메와 진실말하기를 탐색했다면, 버틀러는 일상 속에서 규범에 따르는 수행하는 과정의 어긋남을 포착했다.  그 어긋남의 과정에서 규범은 변할 수 있다. 어차피 그 규범 역시 자의적인 것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그해 겨울 결국 어느 날부터 아무도 교문 앞에서 체육복 바지 밑단을 돌돌 말지도 않고 선생님도 학생의 치마 속 체육복 바지를 단속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름이 붙여지고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의 이면에 배제되는 것, 감추어진 것, 사라지는 것들이 있다. 그러나 소멸은 아니다. 단지 내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어디에선가 존재하는 것들 말이다. 가시성의 영역에 존재하기 위해 노력하는 삶도 있으나, 가시성의 영역을 넓히고자 하는 것 역시 의미 있는 것일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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