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트러블> 1장 중 페미니즘의 주체로서 '여성들'을 읽고
과거 페미니즘 이론의 과제는 여성을 완전히 혹은 적절하게 재현하는 언어를 계발하여 여성의 가시성을 촉진하는 데 있었다. 그렇게 재현된 여성이 주체가 되어 실천적인 정치행동을 한 것이 Second Wave 페미니즘 운동이었다. 그것 자체로도 큰 의미가 있었으나 최근 여성 정체성을 주체로 하는 페미니즘의 정치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루어지고 있다. 실은 정치적이고 언어적인 재현이 허락되는 범주는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주체가 허락하는 만큼이었다. 바로 백인 중산층 여성. 사실 운동이 급해 무엇이 여성이라는 범주를 구성하고 또 구성해야 하는가에 대한 공통된 합의도 없었다.
우리는 흔히 주체를 생각할 때 자연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회계약을 맺은 법 앞의 주체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근본주의적인 허구다. 푸코는 권력의 사법체계에 의해 주체가 생산되고 재현된다고 보았다. 이 분석에 따르면 결국 주체라는 것은 체제에 종속되어 체제의 필요조건에 따라 형성되고 정의되고 재생산되는 것이기 때문에 페미니즘 주체는 자신이 해방시켜야 할 정치체계에 의해 담론적으로 구성된 셈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페미니즘 비평은 여성을 언어적으로 정치적으로 어떻게 재현할 수 있을 것인가를 탐구하는 것을 넘어서, 페미니즘 주체의 '여성들'의 범주가 권력체계에 의해 어떻게 생산되고 구속받는지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과거 페미니즘 운동에서 주체인 여성들은 하나의 공통의 정체성을 갖는 것으로 가정했다. 그리고 이 공통된 정체성을 가진 여성들은 가부장제, 남성 지배 구조에 의해서 억압받고 있다고 보았다. 때문에 이 억압에서 해방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을 했다. 그러나 사람의 정체성은 젠더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인종적, 계급적, 민족적, 성적, 지역적 양상들을 교차적으로 복잡하게 봐야 한다. 그리고 그 억압의 양상 또한 다층적으로 구성된다.
정치성의 실현과정에서 재현은 어떤 측면에서는 필요하다. 그러나 재현되는 대상이 권력에 의해 범주화된 정체성을 가진 주체라면, 필연적으로 어떤 존재를 배제하고 비체화한다.(그래서 교차성 개념이 나왔고) 페미니즘의 정치적 실천 속에서 정체성의 존재론적 구성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야만 페미니즘을 부활시킬 재현 정치학이 가능하다. 그리고 아예 획일적이고 영속적인 토대를 구축할 필요성으로부터 페미니즘을 해방시킬 급진적 비평도 생각해봐야 한다. 이를 위해 페미니즘의 법적 주체로 간주된 것을 생산하고 또 은폐하는 정치적 작용을 추적하는 페미니즘 계보학을 연구함과 동시에 고정된 토대가 없는 페미니즘을 상상해야 할 것이다.
추가적으로...(아무 말 대잔치)
버틀러는 기존의 페미니즘 운동을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기존의 논의들이 강제적 이성애제도로부터 시작된(?) 남녀의 구분을 당연하게 두고 사고하고 있다는 점에 문제제기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이리가레를 비판하는 것도 바로 그 지점인 것 같다. 이리가레는 남성의미화 경제 바깥의 다른 의미화 체계를 생각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인정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위티그가 좀 더 급진적인 것 같다. 위티그는 젠더라는 개념 자체가 강제적 이성애 제도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고 젠더 개념 자체를 없애버릴 수 있는 구조를 상상하니 말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위티그의 생각은 사고실험 같은 느낌이라서 완전히 이해는 안 된다. 여하튼 버틀러는 기존 페미니즘 운동이 인식가능성의 매트릭스 내에서 관계들(남/여)에 대한 운동이었을 뿐이었음을 비판하며 아예 가시화되지 않았던 존재들을 인식의 영역 내로 끌어들이려고 애쓰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매트릭스(조현준 쌤이 모태라고 번역함) 안에서 사람으로 인식되는데 실패한 이러한 인식 불가능한 존재들이 (4장의 연합의 정치학에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는) 고정된 토대가 없는 페미니즘을 통해 정치성을 확보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버틀러의 본심인 것 같다. 그녀의 사심의 정치학. 어려운데 매력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