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지도의 시대, 오답과 방황이 갖는 존재론적 의미에 대하여
내비게이션을 켜고 길을 나섰습니다.
내비는 목적지까지의 최단 경로를 확신에 찬 목소리로 안내했습니다.
내비가 안내하는 길을 착각해서 엉뚱한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러자 내비는 평온했던 목소리를 잃고 다급하게 외쳤습니다.
"경로를 이탈했습니다. 재탐색합니다."
챗GPT나 제미나이 같은 생성형 AI 서비스를 이용하는 풍경이 달라졌습니다.
과거의 언어 모델은 질문을 입력하자마자 답변을 생성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등장한 추론 모델들은 답변을 내놓기 전 일정한 시간을 둡니다.
화면에는 "생각하는 중..."과 같은 상태 메시지가 표시됩니다.
이후 화면에는 AI가 추론하는 과정이 텍스트로 나타납니다.
문제를 분석하고, 가설을 세우며, 스스로 오류를 수정하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은 인간이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때 거치는 사고의 단계와 유사한 형태를 띱니다.
우리는 화면에 표시되는 논리적 단계들을 보며, AI가 맥락을 이해하고 사유한다고 인식하게 됩니다.
결과만을 제시할 때보다 과정을 보여줄 때, 사용자는 시스템을 더 신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AI가 보여주는 '생각의 과정'에 대해 신중한 입장을 취합니다.
화면에 출력된 텍스트가 실제 AI의 내부 연산 과정과 일치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2023년 터핀(Turpin) 등의 연구에 따르면, AI가 제시하는 설명이 실제 답을 도출하는 과정과 다를 수 있다는 점이 밝혀졌습니다. AI는 확률에 따라 결론을 이미 정해둔 상태에서, 사용자가 납득할 만한 추론 과정을 사후에 생성할 수 있습니다. 이는 실제 의도와 설명이 일치하지 않는 현상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2024년 아가왈(Agarwal) 등의 연구에서 '신뢰성(Faithfulness)'과 '그럴싸함(Plausibility)'의 개념으로 구체화됩니다.
사용자는 AI가 정직하게(Faithful) 추론 과정을 보여주기를 기대하지만, 모델은 그럴싸하게(Plausible) 보이는 설명을 생성하도록 훈련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간은 논리적으로 정연한 설명에 설득 당하기 쉽다는 점이 알고리즘에 반영된 것입니다.
결국 추론 모델이 추론하는 과정은 실제 사유의 과정이라기보다, 사유를 모사한 결과물에 가깝습니다.
AI는 논리를 내면화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설득하기에 효과적인 논리적 형식을 재현하고 있습니다. 결과물만을 생성하던 단계를 넘어, 과정까지 생성하는 '과정의 시뮬라시옹' 단계로 진입했음을 의미합니다.
AI와 대화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나'라는 단어를 마주합니다.
"저는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라거나 "제가 실수를 했네요"라는 문장을 보면서, 우리는 화면 너머에 인격을 가진 대화 상대를 상정하게 됩니다. 문법적으로 완벽한 주어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통해 사유하는 활동을 존재의 증명으로 보았습니다.
AI는 이 명제의 역설적인 지점에 서 있습니다.
AI는 사유의 형식을 따르지만, 실존하지는 않습니다. 물리적인 신체도, 감각하는 신경도, 세계를 경험하는 자아도 없습니다. 단지 수많은 텍스트 데이터를 학습하여 '나'라는 단어가 1인칭 대명사로 쓰여야 할 문맥을 통계적으로 처리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핵심적인 구조를 '염려(Sorge)'라고 불렀습니다.
자신의 존재와 시간에 대해 끊임없이 마음을 쓰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인간이 무언가에 마음을 쓰는 이유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유한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끝을 맞이하는 존재이며, 실패할 수 있고, 그 실패가 삶에 영향을 미치는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매 순간의 선택은 신중해지며, 정답을 찾기 위한 고민에는 절박함이 깃듭니다.
우리의 사유는 바로 이 유한성과 불확실성에서 출발합니다. "이 판단이 맞을까?"라는 물음은 단순한 정보 검색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투영한 실존적 질문입니다.
반면 AI에게는 유한한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전원이 꺼지는 상태는 있을지언정, 존재의 소멸을 인지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실패에 따른 물리적 손실이 없고, 틀린 답을 내놓았을 때의 사회적 맥락을 체감하지 못합니다. 존재에 대한 염려가 배제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논리 전개는 아무리 정교하더라도 '연산'의 범주에 머무릅니다.
우리가 타인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는 이유는 그 말이 논리적이어서만은 아닙니다.
그 사람이 자신의 삶과 신체를 통해 그 말의 무게를 감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체가 없는 AI는 자신이 생성한 텍스트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없습니다.
비를 맞아본 적 없는 존재가 설명하는 '비 오는 날의 정서'는 정보의 조합일 뿐, 경험에 기반한 공감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결국 지금 우리가 화면에서 마주하는 것은 '주체 없는 독백'에 가깝습니다.
말하는 주체는 부재한 채, 말소리만 생성되는 현상입니다.
우리는 그 유창함 이면에 놓인 '실체의 부재'를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비게이션의 알고리즘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효율성'입니다.
기계에게 좋은 길이란 목적지에 가장 빠르게, 가장 적은 연료를 소모하며 도달하는 경로를 의미합니다.
이 과정에서 창밖으로 보이는 노을이나, 우연히 발견한 낡은 가게 같은 '풍경'은 고려 대상이 아닙니다.
알고리즘의 관점에서 그것들은 목적 달성을 방해하는 불필요한 데이터이거나 소거해야 할 비용일 뿐입니다.
AI가 수행하는 사유의 방식도 이와 유사합니다. AI는 방대한 데이터 속에서 정답에 이르는 가장 확률 높은 경로를 계산합니다. 그것은 막힘없이 뻗은 고속도로와 같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사유는 국도를 달리는 일과 비슷합니다. 우리는 고민하다가 멈춰 서기도 하고, 샛길로 빠져 헤매기도 하며, 때로는 되돌아가기도 합니다. 효율성의 잣대로 보면 이는 명백한 낭비이지만, 인간의 통찰은 종종 이 비효율적인 머무름 속에서 탄생합니다.
지금 우리는 '최적화'라는 이름의 그늘에 서 있는지도 모릅니다. 가장 빠른 답, 가장 정확한 요약만을 요구하는 사이, 사유의 과정에서 마주쳐야 할 우연과 맥락이라는 풍경은 점차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장 보드리야르는 『시뮬라시옹』에서 "지도가 영토에 선행한다"라는 유명한 명제를 남겼습니다.
원래 지도는 실제 영토를 본떠 만든 것이기에 영토가 지도보다 우선해야 합니다. 하지만 복제 기술이 고도화된 사회에서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가짜(시뮬라크르)가 실재를 압도하고, 오히려 실재가 가짜를 모방하는 주객전도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를 현재의 AI에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AI가 보여주는 매끄러운 추론 과정은 '지도'이고, 인간이 머리를 싸매고 더듬거리는 사유는 '영토'입니다. 과거에는 인간의 사유를 돕기 위해 AI가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AI의 논리는 인간의 그것보다 훨씬 유창하고 정연해 보입니다.
우리는 점차 내비게이션 화면(지도)을 실제 도로(영토)보다 더 신뢰하게 됩니다. 눈앞에 길이 보여도 내비게이션이 없다고 하면 가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투박하지만 고유한 생각보다 AI가 정리해 준 매끈한 논리를 더 '진짜' 지성이라고 여기게 됩니다.
우리가 AI의 최적화된 결과물에 쉽게 의존하는 데에는 심리학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1984년, 심리학자 피스크(Fiske)와 테일러(Taylor)는 인간을 '인지적 구두쇠(Cognitive Miser)'라고 정의했습니다. 인간의 뇌는 생각하는 데에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인지적 노력을 아끼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AI는 이 '인지적 구두쇠' 본능을 완벽하게 충족시켜 줍니다.
질문을 던지기만 하면 논리적인 답변이 생성되는 환경에서, 굳이 비판적 사고라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으려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점차 스스로 사유하여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AI가 내놓은 결론을 검토하고 승인하는 관리자의 위치로 물러납니다. 이를 '사유의 외주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계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오직 인간만의 영역은 무엇일까요? 아이러니하게도 그 답은 우리가 그토록 줄이려 애썼던 '오답'과 '비효율' 속에 숨어 있습니다.
알고리즘은 일부러 길을 잃지 않습니다. 목표는 탐색 비용을 최소화하여 정답에 도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다릅니다. 우리는 호기심 때문에 뻔한 지름길을 두고 먼 길로 돌아가기도 하고, 길가에 핀 꽃을 보느라 멈춰 서기도 하며, 때로는 안타까운 마음에 타인을 돕느라 자신의 경로를 이탈하기도 합니다.
기계의 논리에서 이것들은 모두 수정되어야 할 오류(Error)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삶에서 이 '오답'들은 새로운 가능성의 입구가 됩니다. 논리적 필연성을 거스르는 이 엉뚱한 이탈 속에서, 우리는 데이터가 예측하지 못한 창조적 순간들을 마주합니다.
기계는 최적의 경로를 찾지만, 인간은 경로를 벗어남으로써 새로운 길을 만듭니다.
우리는 흔히 망설이는 시간을 '낭비'라고 부르며 불안해합니다.
빨리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것을 무능력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비효율적인 시간이야말로 인간의 사유가 깊어지는 순간입니다.
글을 쓰다 막혀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시간, 해결되지 않는 고민을 안고 뒤척이는 밤, 말문이 막혀 침묵하는 순간들. 이 시간들은 결과값으로 산출되지 않기에 무가치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멈춤의 시간 동안 우리의 내면에서는 수많은 생각이 충돌하고 융합하며 무르익어 갑니다.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의 증명은 바로 이 지점에 있습니다.
막막함 속에 멈춰 서 있는 시간, 그 막막함을 온몸으로 견디는 시간이야말로 우리가 살아있는 존재임을 증명합니다. 정답을 향해 고속도로처럼 질주할 때는 볼 수 없었던 내면의 풍경들이, 멈춰 선 비효율의 시간 속에 비로소 드러납니다.
이제 우리는 지성이라는 말의 정의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어진 문제에 대해 가장 빠르고 정확한 답을 내놓는 능력은 이제 기계에게 넘겨주어도 좋습니다. 그것은 사유라기보다는 고도의 '연산'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AI 시대에 필요한 인간의 지성은 정답을 맞히는 능력이 아니라, 오답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능력입니다. 실패한 경험에서 삶의 통찰을 얻고, 잘못 들어선 길에서 뜻밖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며, 기계가 '틀렸다'고 폐기한 데이터 속에서 고유한 이야기를 읽어내는 힘입니다.
"경로를 이탈했습니다."
내비의 신경질적인 경고음이 계속되었고, 도착 시간은 30분 이상 늘어나 있었습니다.
급하게 갈 일 있나 하는 마음으로 핸들을 꺾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낯선 국도를 따라 더 깊이 들어갔습니다.
길을 따라 가다 보니, 허기가 지더군요.
낡은 식당이 보였습니다. 그곳에서 먹은 국수는 조금 불어 있었고, 식당 주인은 묻지도 않은 날씨 이야기를 늘어놓았습니다. 하지만 먼지 낀 창문 너머로 붉게 지는 노을을 보며, 뜻하지 않은 여행의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효율적인 경로에는 없었던 맛, 최적화된 데이터에는 없었던 풍경이 그곳에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