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하는 머리 - 매체가 바꾸는 사고의 진화, 그리고 LLM
이집트의 신 테우트가 문자를 발명해 타무스 왕에게 보여주었다. 테우트는 말했다.
"왕이시여, 문자는 이집트 사람들의 지혜와 기억력을 늘려 줄 것입니다. 영원히 남는 지혜와 기억력을 사람들에게 널리 보급해 주십시오. 이집트의 미래를 짊어질 것입니다."
타무스 왕이 말했다.
"테우스여, 발명자는 자신이 창조한 기술이 미래에 해가 될지 득이 될지 판정하는 재판관이 될 수 없소. 그 몫은 사용자에게 있는 것이오. 자손들을 사랑하여 발명한 당신의 문자는 자칫 사람들의 기억력을 사용하지 않게 하여 더 많은 것을 잊게 할 수도 있소. 또 문자에 의존하여 지혜롭지 않으면서도 지혜로운 것처럼 외양만 갖춘 사람들이 많아지면 진정한 지혜 대신 지혜에 대한 자만심만이 가득 차, 오히려 사회에 짐이 될 것이오. 머릿속에 있는 기억과 지혜를 대신하기에 문자는 지나치게 의존적이오."
기원전 아테네의 광장 한쪽에서 소크라테스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정의란 무엇인가?"
"법을 지키는 것이 정의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법은 정의로운가?"
"음..."
"만약 불의한 법이 있다면, 그 법을 지키는 것도 정의인가?"
질문은 이어지고, 대답은 흔들립니다. 확신은 의심이 되고, 의심은 다시 질문이 됩다.
말은 뱉는 순간 공기 중으로 흩어집니다. 다시 돌아가서 밑줄을 칠 수 없습니다. 정정할 수도 없고, 멈춰서 곱씹을 수도 없습니다. 말은 흐르고, 사라지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 휘발성이 사고의 형식을 결정했습니다.
이 시대의 사고는 저장된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탁구와 같이 상대의 말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여 받아치는 운동 감각에 가까웠습니다.
날아오는 공을 바로 쳐내지 않으면 바닥에 떨어지듯이 잠시라도 멈추면 대화도 바닥에 떨어집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사고는 문답이었습니다. 상호작용의 흐름으로서, 현재 속에서만 존재하는 붙잡을 수 없는 리듬이었습니다. 말은 붙잡아둘 수 없었기에, 기억력이 지성의 척도였습니다. 운율을 타고, 리듬을 새기고, 반복하여 암송하는 것.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통째로 외우는 것이 교양의 증거였습니다.
시간이 흘러 중세 수도원의 서고, 촛불 아래 앉은 수도사가 양피지에 책을 베껴 쓰고 있습니다. 눈으로 보고, 입으로 중얼거리고, 손으로 쓰는 일입니다. 온몸을 쓰는 작업이었죠.
문자는 흘러가는 소리를 고정시켰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소리로 존재했습니다.
이 시대의 독서는 '낭독'이었습니다. 글자는 눈으로 보기 위한 기호가 아니라, 입으로 소리 내기 위한 악보였습니다. 수도사들은 텍스트를 읽으며 중얼거렸습니다. 낮게 웅얼거리는 소리가 서고 안을 채웠습니다.
이 시대의 사고는 문장을 씹어 삼켜 내면화하고, 되새김질하는 반복이었습니다. 한 문장을 하루 종일 되뇌며 그 의미를 몸에 새기는 일이었습니다.
필사는 온몸을 쓰는 노동이었습니다. 양피지는 비쌌고, 잉크는 귀했으며, 한 권의 책을 베끼는 데는 몇 달이 걸렸기 때문에 책은 신성했고, 읽기는 의례였습니다.
한 문장을 하루 종일 되뇌며 그 의미를 몸에 새기는 것.
이 시대의 사고는 머리가 아니라 온몸으로 하는 명상이었습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등장하면서 책은 더 이상 신성하지도 않았고, 희귀하지 않았습니다. 기계가 찍어내는 책들이 쏟아졌습니다.
활자의 대량 생산과 보급은 '사고'의 개념을 바꿨습니다.
책은 직선입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첫 페이지에서 마지막 페이지로. 모든 것이 일렬정렬된 질서 속에 있습니다. 되돌릴 수는 있지만, 기본 흐름은 정해져 있습니다.
이 직선의 질서가 우리의 사고 회로를 직선으로 바꾸었습니다.
중세 수도원의 중얼거림은 멈추었습니다. 서재에는 침묵만이 남았습니다.
눈은 빨라졌고, 생각은 더 빨라졌습니다.
묵독은 사고를 내면화시켰습니다. 책과 나, 둘만의 대화가 되었죠.
인과관계가 중요해졌습니다.
논리적 정합성, 서론-본론-결론이라는 짜임새가 생겼고, 사고는 건물을 짓듯이 차곡차곡 논리를 쌓는 행위가 되었습니다. 명료한 문장, 논리적 구조, 정교한 논증. 이것이 사고의 형식이 되었죠.
"생각을 논리정연하게 글로 풀어낼 수 있는 능력이 사고력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이렇게 생각해 왔고, 지금도 그렇게 믿습니다.
지필 시험, 논술과 같은 사고력 평가도 활자 시대가 만든 관습입니다.
인터넷이 등장하면서 책의 직선적 리듬이 깨졌습니다. 하이퍼링크는 순서를 무시하고 순간이동을 가능하게 합니다. 3페이지에서 갑자기 127페이지로 점프합니다. 이 책에서 저 사이트로, 이 블로그에서 저 논문으로.
선형성이 사라졌습니다.
책이 정해진 길을 따라 정상까지 올라가는 등산이었다면, 검색은 평원을 가로지르는 유목입니다.
평원에는 정해진 길이 없습니다. 물을 찾아, 풀을 찾아, 계절을 따라 이동합니다. 중요한 건 깊이가 아니라 연결입니다.
정보는 더 이상 한 권의 책처럼 연결된 서사가 아니라, 블로그 글의 세 번째 문단, 위키피디아 항목의 첫 단락, 논문 초록의 한 문장. 그 조각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맥락입니다.
사고의 형식도 달라졌습니다.
먼저 키워드를 떠올리고, 검색 결과를 훑어보며, 쓸모있는 조각을 골라내고, 그것들을 조합하여 나름의 이해를 구성합니다. 탐색-평가-선별-조합. 이 순환을 반복했습니다.
사고는 외부로 확장되었습니다. 머릿속이 아니라 검색창과 브라우저 탭 사이에서 일어났습니다. 기억은 북마크로, 사유는 여러 탭의 조합으로 우리 머리 바깥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정보는 바깥에 있지만, 여전히 사고의 주체는 우리였습니다. 무엇을 검색할지, 어떤 정보를 믿을지, 어떻게 조합할지는 우리가 결정했죠. 맥락을 다시 엮는 일, 그것은 온전히 인간의 작업이었습니다.
그리고 대형 언어 모델(LLM)이 등장했습니다.
검색창에 키워드를 넣는 게 아니라 문장으로 질문합니다.
검색 시대에는 조각들을 모아 맥락을 재구성했다면, 이제는 맥락 자체가 생성됩니다. 사고의 단위가 '키워드'에서 다시 '문장'으로, '조각'에서 '맥락'으로 바뀐 겁니다.
검색된 정보는 고정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AI의 답변은 고정되지 않고, 매번 달라집니다. 무수한 답변 중에서 그때그때 하나를 골라냅니다.
여기서 사고의 형식이 또 바뀝니다.
우리는 더 이상 정답을 '찾는' 게 아닙니다. 최적의 답을 '이끌어내는' 지휘자가 됩니다.
마음에 안 들면 다시 물어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다른 관점에서", "이 부분을 빼고". 그러면 답변이 바뀝니다. 질문이 정교해질수록 답변도 정교해집니다.
사고는 이제 혼자 사고하는 과정이 아닙니다. 프롬프트를 던지고, 생성 결과를 읽고, 다시 프롬프트를 조정하는 반복입니다. 피드백 루프. 결과물을 보고 방향을 트는 순환 과정이 사고의 핵심이 됩니다.
문제를 어떻게 프레이밍할지, 결과를 어떻게 평가할지, 어떤 방향으로 다시 물어볼지가 중요해졌습니다.
사고의 일부는 기계로 넘어갔습니다. 문장 생성, 맥락 구성, 정보 종합 같은 것들이요. 하지만 여전히 인간에게 남은 것들이 있습니다.
무엇이 중요한 질문인가? 이 답변은 적절한가? 어떤 맥락이 빠졌는가? 이 표현에는 어떤 편향이 숨어 있는가?
도예가가 흙을 빚듯, 우리는 AI가 내놓은 원재료를 만지고 다듬어 모양을 잡습니다. 질문력, 맥락 감지, 평가 능력, 편향 감지, 조율 능력. 이것들이 새로운 사고의 능력이 됩니다.
이 최첨단의 풍경은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으로 돌아온 것처럼 보입니다.
질문하고, 답변 듣고, 반박하고, 다시 질문하는 리듬 말입니다.
하지만 똑같이 돌아온 건 아닙니다. 나선형 계단을 한 바퀴 돌아 한 층 위의 자리에 도착했습니다.
과거의 대화 상대는 비슷한 지적 능력을 가진 인간이었습니다. 지치기도 하고, 화도 내고, 때로는 대화를 거부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대화 상대들이 종종 짜증을 냈던 것처럼요. 대화는 양방향이었고, 상대도 나를 변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의 대화 상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AI는 모든 지식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의식은 없습니다. 이해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로 이해하지는 않습니다. 지치지 않고, 화내지 않으며, 얼마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아가 없는 타자입니다.
문답법 시대의 대화가 인간과 인간의 '공명'이었다면, LLM과의 대화는 인간과 거대한 데이터의 '충돌과 조율'입니다.
이 차이는 사고를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이동시킵니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과 대화하며 무지를 자각했습니다.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 자신의 생각을 돌아보는 능력의 탄생이었죠.
우리는 AI와 대화하며 인간성을 자각합니다. 기계가 할 수 없는 것, 기계가 해서는 안 되는 것, 인간이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말이죠.
AI는 무한한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옳은지, 좋은지, 아름다운지는 판단하지 못합니다. 윤리적 판단, 가치 부여, 의미를 만드는 것. 이것들은 여전히 인간의 영역입니다.
문답으로 돌아왔지만, 사고의 대상이 달라졌습니다. 지식이 아니라 판단, 정보가 아니라 가치, 논리가 아니라 의미를 다루게 된 겁니다.
타무스는 문자가 기억을 약화시킬 것이라고 걱정했습니다.
타무스는 틀렸을까요? 어쩌면 맞았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전화번호 하나 외우지 못하게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단순 암기 대신, 논리적 구조와 거대한 지식의 연결망을 얻었습니다.
매체가 바뀔 때마다 사고의 형식은 변했고, 사람들은 잃어버린 것에 대해 탄식했습니다. 하지만 사고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다른 그릇에 담겨 다른 모양으로 계속되었을 뿐입니다. LLM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펜을 놓고 AI와 대화한다고 해서 사고가 멈추는 것은 아닙니다. '직접 쓰는 사고'에서 '지휘하고 조율하는 사고'로 이동할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AI 때문에 바보가 될까?"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새로운 도구와 함께, 어디까지 생각할 수 있는가?"여야 합니다.
타무스는 문자를 거부했지만, 결국 그 문자로 인해 자신의 경고가 후대에 전해지는 역설을 맞이했습니다. 우리 또한 AI를 경계하면서도, 결국 AI와 함께 생각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사고의 모양이 또 한 번 달라지고 있습니다. 그 변화의 끝에서 우리가 어떤 인간이 될지는, 이제 우리의 질문에 달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