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사용 한도가 재편하는 업무 시간과 성과
지인 한 명이 금융권에서 일하는데, 최근에 회사에서 팀 단위로 한 달에 200달러짜리 Claude MAX 구독을 신청해줬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답니다.
그 좋은 걸 왜 사용 안 하냐고 물어 보니, 팀 단위로 계정을 공유하니까 내가 어떤 질문을 했는지가 대화 목록에 공개가 되는 게 싫어서 그렇답니다. 사실 개발자가 아니라면 챗GPT나 클로드 같은 AI를 사용하는 방법이 웹 화면에서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는 거에 익숙한 건 사실입니다.
저는 최근에 과제를 따기 위해 제안서 작업을 하면서 개발자 아닌 사람에게도 클로드 코드(Claude Code)가 유용하다는 걸 경험했기 때문에 최상급 모델을 원없이 사용할 수 있는 요금제의 구독료가 허공으로 사라지는 것 같아서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지인한테도 하루 날 잡아서 노트북 들고 오면 어떤 식으로 활용하면 되는지를 알려 주기로 했습니다.
챗GPT나 클로드, 제미나이 같은 AI 서비스는 무한정 쓸 수가 없습니다.
한참 대화하다가 갑자기 "사용량을 초과했습니다"라는 메시지를 받아 본 적 있을 겁니다. 무료든 유료든 사용량에 제한이 있거든요.
클로드 같은 경우는 사용량이 다 차면 다섯 시간을 기다려야 다시 쓸 수 있습니다. 처음엔 그냥 불편한 정도였는데, 쓰다 보니 슬슬 남은 양을 의식하게 됩니다. 지금 이걸 물어봐도 되나, 이건 좀 아껴뒀다가 나중에 물어볼까. 핸드폰 데이터 잔량 확인하듯이 남은 사용량을 계산하게 되는 거죠.
그런데 이게 개인 구독이 아니라 회사 단위로 올라가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엔비디아의 젠슨 황 대표가 올해 3월에 엔지니어 한 명한테 연봉의 절반에 해당하는 토큰 사용료(token budget)를 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토큰은 AI한테 던지는 질문이나 명령이 쪼개지는 단위인데, 이 토큰을 쓸 수 있는 비용을 연봉에 얹어 주겠다는 겁니다. 금액으로 치면 한 해에 10만에서 15만 달러, 우리 돈으로 1억 3천만 원에서 2억 원쯤 됩니다. 거기서 한마디를 더 붙였습니다. 연간 25만 달러어치를 안 쓰는 엔지니어가 있으면 자기가 직접 난리를 치겠다고요.
농담처럼 들리지만 토큰 사용량이 곧 업무량이랑 같은 말이 되는 겁니다. 적게 쓰면 게으른 거고, 많이 쓰면 열심히 한다는 논리가 만들어지고 있는 거죠.
이 논리가 실제로 현실이 되기도 했습니다.
페이스북 본사, 그러니까 메타에서 '클로드노믹스(Claudeonomics)'라는 사내 순위표를 만들었습니다. 직원 8만 5천 명이 한 달 동안 AI를 얼마나 썼는지 순위를 매긴 건데요, 전체 사용량이 60조 토큰이었습니다. 이게 얼마나 큰 숫자냐면, 한국어 소설책 한 권이 대략 토큰 15만 개 정도 됩니다. 60조면 소설책 4천만 권 분량입니다.
직원 중에 1등은 한 달에 2,810억 토큰을 썼다고 합니다. 대략 소설책 187만 권어치를 한 달에 쓴 거죠. '토큰 전설(Token Legend)', '캐시 마법사(Cache Wizard)' 같은 칭호까지 붙었습니다.
문제는 순위를 올리려고 실제 업무와 상관없이 AI를 그냥 돌린 사람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할 일이 없는데 AI한테 아무거나 시키는 거죠. 순위표에서 이름이 올라가는 게 좋으니까요. 마크 저커버그 본인은 250등 안에도 못 들었습니다. 이 순위표는 외부에 알려지자마자 이틀 만에 폐쇄됐습니다.
한국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개발자 커뮤니티나 IT 게시판에 가면 "이번 달 AI 구독료 50만 원 나왔다"는 글이 올라옵니다. 클로드 같은 경우에 맥스 요금제에 여기저기 API 사용료까지 합치면 월 20만에서 50만 원은 쉽게 나오거든요.
그런데 이런 글이 불만이 아닌 경우가 꽤 있습니다. 이만큼 쓸 정도로 일을 빡세게 한다는 뉘앙스가 깔려 있거든요. 공식 순위표는 아니지만, 사용한 금액이 곧 실력이라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생기고 있다는 증거죠.
여기서 빠져 있는 게 하나 있습니다.
워크라이틱스(Worklytics)라는 조사 기관이 2025년에 보고서를 하나 냈는데요, 회사에서 생산성이 가장 높았던 사람들은 업무 시간의 10퍼센트 정도만 AI를 쓴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들의 성과는 100명 중에서 5등 안에 드는 수준이었는데, 정작 그렇게 쓰는 사람이 전체의 3퍼센트밖에 안 됐다고 합니다. AI를 잘 쓴다는 게 많이 쓴다는 뜻은 아닌 거죠.
경영진한테 물어보면 사용량과 성과 사이의 차이가 더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AI에 돈을 쏟아부었는데 그만큼 이익이 늘었느냐고 했더니, 열 명 중 여덟 명이 증명을 못 하겠다고 답했습니다. 대표급도 절반 넘게 AI를 도입해 놓고 매출은 안 늘었다고 했고요.
AI의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투입과 성과 사이의 간극은 다른 관점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회사 차원의 의사결정이라면 AI로 성과를 낼 만한 업무인지, 어떤 부분이 AI를 도입한 효과를 낼 부분인지, 사람들은 성과와 직접 연결시킬 만한 활용 역량을 갖추고 있는지를 따져보고 비용을 투입하는 게 순서일 겁니다. 그게 아니면 이제 막 초등학교 입학한 자녀에게 코딩이 대세라고 노트북부터 덜컥 사주는 거나 다름없는 겁니다.
많이 쓰는 것과 잘 쓰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인데, 지금 주변 상황은 일단 많이 쓰라는 쪽에 가깝습니다.
한국 직장인 열 명 중 여섯 명 넘게 생성형 AI를 쓰고 있다고 합니다. 그 중 절반 이상은 업무 목적이고요. 새 기술을 빨리 받아들인다는 뜻이긴 합니다. 한편으로는 안 쓰면 뒤처진다는 압박도 그만큼 퍼져있다는 뜻이겠죠.
AI를 쓴다고 퇴근이 빨라진 건 아닙니다. 같은 시간에 처리하는 일의 가짓수가 늘었을 뿐, 일하는 시간 자체는 줄지 않았습니다.
할 일이 줄어든 게 아니라 할 일이 더 쌓인 거죠.
한국 직장에서 성실함을 증명하는 방식은 시대마다 바뀌어 왔습니다.
한때는 오래 앉아 있는 게 곧 성실함이었습니다. 칼퇴하면 눈치 보이던 시절이 있었죠. 그게 AI 사용량으로 바뀔 조짐이 보입니다. 오래 앉아 있는 대신 AI를 많이 쓰는 게 열심히 한다는 증거가 될 수 있는 거죠.
형태만 바뀌고 구조는 그대로인 셈이죠. 옆 사람이 퇴근 안 하니까 나도 못 가는 것처럼, 옆 사람이 AI를 많이 쓰면 나도 더 써야 할 것 같아지는 거니까요.
몇몇 기업에서 AI 활용 능력을 인사 평가에 넣는 곳이 생기고 있다고 합니다.
교육 이수 시간이나 자격증처럼 AI를 얼마나 열심히 활용했느냐가 점수에 반영되는 방식이죠. 이렇게 되면 실제로 도움이 됐는지와 상관없이 쓴 흔적을 남겨야 합니다.
커뮤니티에서 자발적으로 자랑하던 게 진짜 인사 평가 기준이 될 수도 있는 겁니다.
이 사용량 한도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주말에도 리셋됩니다. 밤에도 리셋되고요.
사무실에는 문 닫는 시각이 있습니다. 불 꺼지면 그날은 끝이죠. 그런데 AI 사용량 한도에는 문 닫는 시각이 없습니다.
토요일 아침에 눈을 떠도 새 몫이 이미 채워져 있습니다.
토요일 오후에 소파에 누워 있는데 머릿속에서 계산이 시작됩니다.
'지금쯤 한도가 리셋됐을 텐데, 이대로 월요일까지 안 쓰면 그냥 날리는 거잖아.'
실제로 날리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한도가 다시 차는 것뿐이죠. 그런데 느낌은 다릅니다. 사용을 안 하면 허공에 돈을 흘려 보낸 것처럼 느껴집니다. 토큰 사용료가 연봉의 절반이라는 말을 들은 뒤로는 더 그렇습니다.
쉬는 시간에 AI를 안 쓰는 게 돈을 낭비하는 것 같고, 쉬고 있는 게 불안합니다.
시간이 토큰을 따라가기 시작합니다.
몇 시에 자고 몇 시에 일어나느냐가 아니라, 몇 시에 한도가 리셋되느냐가 하루를 나누는 기준이 됩니다.
새벽 2시 리셋, 오전 7시 리셋, 정오 리셋. 근무 시간 대신에 리셋 주기가 하루를 쪼개고 있습니다.
점심 시간이 다 되어 갑니다.
클로드코드의 사용량을 확인하니 이제 10% 정도 남았습니다. 사용량은 2시간 뒤에 다시 리셋되네요. 10% 마저 채우고나서 밥 먹고 들어오면 사용량이 초기화되는 타이밍에 맞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0%를 채우기는 해야 하는데, 딱히 할 일이 떠오르질 않습니다.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나기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