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리즘의 소음 속에서 묵묵히 쌓아 올린 시간
2019년, 알파고 사건으로 온갖 미디어가 인공지능 이야기로 떠들썩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저도 제 전공인 국어학 분야에 인공지능을 접목해보겠답시고, 당시에 거의 최고 사양 맥북 프로를 500만원을 주고 질렀습니다. 코딩 근처에 가 본 적도 없었지만 독학하겠다는 계획도 있었고, 배우지 않으면 뒤쳐질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1년 가까이 딥러닝은커녕 파이썬 라이브러리 설치에 환경 설정만으로 시간을 허비했습니다. 코딩을 한 번도 경험 안 해본 초보자가 아무 기초도 없이 독학만으로 하기에는 진입 장벽이 너무 높았습니다.
자연어 처리 오픈 채팅방에서 모델 학습 이야기를 괜히 꺼냈다가, "맥북 프로로 모델 학습을 어떻게 시키냐"는 핀잔만 들었습니다.
그 한마디에 제가 아무것도 모르고 돈만 썼다는 걸 깨달았죠. 500만원짜리 맥북 프로가 코딩하는 즐거움을 바로 만들어 주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딥러닝 머신이 아닌, 500만원짜리 유튜브 머신이 탄생했습니다.
십 년 전, 유행은 퍼져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친구가 먹어보고 맛있다고 했고, 그 친구의 친구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소문을 냈습니다. 동네에서 동네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데는 꽤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때는 유행을 만드는 주체가 그나마 보였습니다. 맛집 블로그가 있었고, 연예인이 들고 나온 가방도 있었습니다. 줄 선 사람들이 뒤따랐고요. 눈에 보이는 흐름이 있었죠.
지금은 다릅니다. 플랫폼은 우리가 얼마나 오래 봤는지, 어디서 멈췄는지를 읽고 공유 여부까지 확인합니다. 참여도가 높은 콘텐츠는 더 많은 사람에게 노출되고, 노출이 늘면 참여도가 또 올라갑니다.
이 순환이 빠르게 돌면서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작은 관심이 순식간에 '지금 다들 보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입에서 입으로’라는 과정 없이도 알고리즘이 계속 밀어주다 보니 어느새 유행이 되어 버립니다.
소문으로 퍼질 때와 알고리즘이 밀어줄 때의 확산 속도는 다릅니다.
한국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눈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몸으로 압니다.
분위기를 읽지 못하면 어색해지고, 무리에서 따로 돌면 뭔가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죠. 이건 개인의 성격 문제가 아닙니다. 수평적으로 서로 맞춰 가는 것이 집단 안에서 편안하게 지내는 방식이었으니까요.
'나만 모르나?' 하면서 느끼는 불안함이 있습니다. 대화에 낄 수 없을 때의 소외감도 비슷하고요. 아마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겪는 경험일 겁니다.
알고리즘은 이 불안에 아주 잘 반응합니다.
감정을 자극하는 콘텐츠일수록 사람들이 더 오래 보고, 더 많이 반응하거든요. 불안을 자극하는 콘텐츠는 참여도가 높아서 더 넓게 노출됩니다.
'이거 아직도 못 해 본 사람', '이거 지금 안 하면' 제목이 달린 영상이 피드에 쌓이면 어떻게 될까요.
피드가 만들어낸 불안이 진짜 불안이 되어 버립니다. 플랫폼은 그걸 원합니다.
불안이 내 것처럼 느껴져야 클릭과 조회수가 올라가니까요.
보통은 내가 궁금해서 찾아봤고, 결국 사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이 순서가 자연스러워 보이죠.
실제 경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검색하기 전에 이미 피드에 올라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제까지는 몰랐는데 오늘 피드에 여러 번 보입니다. 자연스레 피드를 눌러 보고 검색도 해보게 됩니다.
내가 원해서 찾은 게 맞긴 합니다만, 그 '원함'이 어디서 시작됐는지는 좀 복잡합니다.
예전에 TV 광고가 몰랐던 제품을 보여주면서 갖고 싶다는 마음을 생기게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지금 알고리즘 피드가 하는 일도 이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훨씬 개인화되어 있고, 우리가 그 사실을 의식하기 어렵다는 점이 다릅니다.
내가 '자발적으로' 찾았다는 느낌이 드는 게 핵심이거든요.
그 느낌 때문에 선택이 더 확신 있어 보이고, 비판적으로 보기가 어려워집니다.
유행을 따른다는 걸 알면서 따를 때는 그나마 방어막이 있습니다. "이거 유행 지나면 또 안 먹겠지" 하면서도 줄을 서는 것처럼요. 소비자로서의 자기 인식이 어느 정도 유지되는 편입니다.
기술 유행은 조금 다릅니다.
최근 오픈클로(Open Claw)라는 오픈소스 AI 에이전트에 대한 관심이 갑자기 커졌습니다. 누군가 SNS에서 "이걸 돌리는 데 맥미니가 가성비로 최고"라고 올렸고 그 말 한마디가 퍼지면서 맥미니가 품절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나도 AI 써봐야지', '맥미니 하나 있으면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라는 생각은 유행을 따른다는 느낌이 덜합니다. 오히려 성장하고 배우는 것 같거든요.
자기계발로 포장된 유행은 비판이 어렵습니다. "왜 샀어요?"라는 질문에 "유행이라서요"가 아니라 "AI 공부해보려고요"가 나오면, 그 다음 질문이 막힙니다.
그 상자가 몇 달째 뜯기지 않아도, 목적이 흐릿해도, '배움'이라는 프레임 안에서는 구매 자체가 이미 좋은 행동처럼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알고리즘이 만들어낸 관심임을 알아채기가 더 어렵습니다.
몇 번 쓰지도 않았는데 당근마켓에 중고로 내놔야 하나를 고민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이런 FOMO(Fear Of Missing Out, 놓치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처방 중 하나로 디지털 디톡스를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스위치를 꺼 놓는 잠깐의 순간이 우리를 알고리즘에서 해방시켜 주지는 않습니다.
플랫폼은 우리의 선택과 사소한 관심을 계속 관찰하고, 우리 스스로도 몰랐던 숨은 관심을 끄집어내기도 합니다.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무언가를 욕망으로 제안하고, 그 욕망을 진짜처럼 느끼도록 계속 부추기는 것도 알고리즘입니다. 그런 점에서 알고리즘이 미처 몰랐던 취향이나 관심사의 후보를 선별해 준다고 볼 수 있지는 않을까요?
물론 알고리즘이 습관을 만들어주지는 않습니다.
알고리즘이 골라 준 여러 욕망의 후보들 중에서 진짜와 가짜를 걸러내는 일, 시간을 더해 습관으로 만들어 내는 일, 진짜 취향으로 만드는 일은 결국 사람의 몫입니다.
지금 저는 취미로 코딩을 하고 일상 업무에서도 종종 코딩을 합니다.
제 코딩 머신은 소위 '깡통'이라 불리는 맥북 에어 기본 사양입니다.
500만원짜리 맥북을 중고로 팔려고 마음 먹고 중고사이트를 들락날락거리는 게 너무 귀찮아서,
중고 카페의 게시물 크롤링을 시도했던 것이 코딩 취미의 시작이었습니다. 개발자가 아닌 사람이라면 낯설 법한 터미널 환경에도 그때 익숙해졌고요. 지금도 그래픽 인터페이스보다 명령어를 입력하는 터미널 환경이 더 편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애플이 99만원짜리 보급형 맥북을 출시했습니다.
제 코딩 취미에 딱이다 싶었습니다. 딱히 살 명분이 없어서 딸 선물 핑계로 하나 사겠다 했더니,
와이프가 허락을 안 해 주네요.
2019년에 500만원짜리는 어떻게 허락을 받았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