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의 효율

AI가 해체하는 '함께 일한다'라는 믿음

by Nomadist

0. 혼밥의 효율


몇 년 전 식사 때를 놓쳐서 혼밥을 하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어색함 그 자체였습니다.

몇 분이냐는 종업원 물음에 혼자라고 답하면 괜히 눈치를 주는 것 같았고, 여러 명이서 같이 식사하는 틈에서 혼자 밥 먹는 내 모습이 괜히 처량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혼밥을 몇 번 하다 보니, 그냥 내가 가고 싶은 식당 마음대로 가서, 눈치 안 보고 메뉴 주문하고, 다른 사람 먹는 속도 신경 안 쓰고 내가 보고 싶은 영상 하나 틀어 놓고 밥 먹는 게 예전과는 다르게 너무 편하더군요. 오히려 이전에 같이 밥 먹던 시간들이 너무나도 비효율적으로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점점 식당들도 변하더군요. 혼밥 좌석도 생기고 키오스크 주문도 생기면서 눈치 볼 필요도 없어지고요.

이제는 혼밥이 자연스러운 점심시간 풍경으로 자리잡았습니다.




1. 함께 일하는 이유


나눠야 했던 진짜 이유


회사가 왜 생겼는지 궁금증을 가져 본 적은 없습니다. 너무 당연한 질문이라서요. 일이 많으면 사람이 여럿 필요하고, 사람이 여럿이면 조직이 생긴다, 이 이야기가 자연스러워서 그 앞에 있는 질문을 잘 안 하게 됩니다.


1937년 영국 경제학자 로널드 코즈(Ronald Coase)는 '기업의 본질'이라는 논문에서 조금 다른 각도로 질문을 던졌습니다. 시장이 이미 있는데 왜 굳이 회사를 만드는가? 필요한 사람을 그때그때 계약해서 쓰면 되지 않나? 코즈의 답은 간단했습니다. 계약에는 비용이 든다는 겁니다. 적합한 인재를 찾고 조건을 조율하는 것부터 결과물을 검수하기까지, 모든 과정에는 유무형의 비용이 따릅니다. 이런 비용을 코즈는 '거래 비용(transaction cost)'이라고 불렀습니다. 실제로 지출되는 금액이기도 하고, '서로를 맞추는 데 들어가는 에너지'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한 지붕 아래 사람을 두면 이 비용이 줄어든다는 거죠.


조직이 형성된 근본적인 동기는 선의보다는 비용 절감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여럿이 함께 일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게 아니었습니다. 혼자 하거나 시장에서 필요할 때마다 계약하는 것보다 조직을 꾸리는 게 더 효율적이기때문에 비로소 회사가 생겼습니다.


조율 비용


이 논리는 조직의 모양새도 설명합니다. 개발자, 기획자, 마케터 위에 팀장을 두는 구조는 각자의 전문성을 살리면서도 조율 비용을 줄이기 위한 방식이었습니다. 각자가 알아서 하되 방향이 맞게 움직이도록 붙잡아주는 사람이 필요했거든요.


조직도 한 장에 그 논리가 다 들어 있습니다. 누가 누구에게 보고하고 어떤 결정은 어디서 내려야 하고 어느 라인에 묻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그 선들은 단순한 위계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서로 부딪히지 않고 조율할 수 있는가'에 대한 오랜 대답이었습니다.


코즈가 이 논문으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게 1991년입니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지금 그 오래된 대답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2. AI가 지우는 것


한 사람의 범위


2026년 2월 28일 밤, 서울 성북구의 한 숙소에서 '랄프톤'이라는 해커톤이 열렸습니다. 참가자들은 아이디어와 설계도만 내놓고 자리를 떴습니다. 보통 해커톤은 사람이 밤을 새우지만, 랄프톤에서 밤을 새워 코딩을 한 건 사람이 아니라 AI 에이전트였습니다. 이튿날 아침까지 만들어진 코드는 50만 줄이 넘었습니다. 심지어 키보드를 한 번도 두드리지 않은 팀도 있었습니다. 행사를 후원한 투자 회사의 이사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기존에 알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프로필의 창업자'를 만나야 할 것"이라고요.


'기존에 알던 창업자'란 개발자, 디자이너, 기획자가 한 팀이 되어야 뭔가를 만들 수 있던 시절의 창업자를 뜻합니다. 그 전제가 흔들리고 있다는 거죠.


같은 달 KAIST는 'AI 에이전트 기반의 1인 창업 육성 프로그램'을 발표했습니다. 기획부터 개발, 마케팅, 회계까지 창업에 필요한 모든 과정을 혼자 해낼 수 있도록 훈련하는 프로그램입니다. KAIST 창업원장은 "AI 시대에는 창업의 단위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미국에서 1인 창업가가 세운 스타트업 비율은 2015년 17%에서 2024년 35%로 두 배 넘게 올랐습니다. 창업 지원 플랫폼 카르타(Carta)의 집계입니다. 함께 일할 동료와 사무실 없이도 사업을 시작할 수 있게 됐다는 신호입니다.


무너지는 조율 비용


코즈의 논리와 연결지어 보면 AI가 지금 하는 일이 무엇인지 선명해집니다. AI는 정보를 찾고 초안을 쓰고 데이터를 정리하고 코드를 짜고 메일을 다듬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코즈가 말한 '거래 비용'입니다. 여럿이 나눠서 해야 했기 때문에 조율이 필요했고 조율이 필요했기 때문에 조직이 필요했던 그 일들입니다.


AI가 그 일들을 처리하기 시작하면서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조직의 전제를 의심하는 질문이 가능해졌습니다.


'왜 나눠서 해야 하나?'


이건 단순히 효율이 올라갔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제는 '여럿이 함께 일해야 하는 이유' 자체를 원점에서 재검토할 수 있게 된 셈입니다.




3. 균열이 생기는 곳


결재 라인


이 균열이 한국 사회에서는 어떤 의미일까요?


한국의 직장 문화에서 조직은 '조율 도구'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우리는 함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자리였습니다. 결재라인이 길고 보고 양식이 있고 회의가 자주 잡히는 것은 업무 효율만을 위한 설계가 아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누가 어느 자리에 있는지, 어떤 결정은 누가 내리는지, 이 사람이 나와 같은 조직에 속해 있는지를 끊임없이 확인했습니다.


잡코리아가 2025년에 직장인 1,252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업무에 몰입하는 걸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 '방향이 모호한 업무 지시'를 꼽은 비율이 25.6%였습니다. Z세대 직장인의 90.6%가 이직을 고려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조직에서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은 연봉보다 '의사소통 방식'이었습니다.


이 숫자들이 가리키는 것은 세대 갈등이 아닐 겁니다. 조직이 '함께 일하는 이유'를 제공하지 못할 때 나타나는 반응에 가깝습니다. 조율 도구로서의 기능은 흔들리고 있는데 그 자리에 무엇이 남아야 하는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습니다.


의례만 남는 자리


지금 여러분의 직장에서 벌어지는 보고와 회의, 결재 상당 부분이 실제로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까요? 정보를 전달하는 기능이라면 AI가 더 빠르게 처리할 수 있습니다. 판단을 내리는 기능이라면 결재라인의 길이보다 판단하는 사람의 능력이 더 중요합니다.


갤럽(Gallup)의 조사에 따르면 2024년에서 2025년 사이 매니저 1인당 직접 관리하는 직원 수가 10.9명에서 12.1명으로 11% 늘었습니다. 중간 계층은 줄고 있고 남은 사람의 부담은 커지고 있습니다. 조율하는 자리가 사라지고 있는 겁니다.


AI가 조율 기능을 가져가기 시작하면 그 자리에 남는 건 '형식적인 의례'일 겁니다. 보고를 하지만 결과는 AI가 이미 정리해 놓았고 회의를 하지만 안건은 에이전트가 먼저 검토한 뒤입니다. 형식은 유지되지만 내용이 달라지는 자리의 어색함이 지금 한국의 조직 곳곳에서 조용히 쌓이고 있습니다.




4. 아직 아무도 모르는 균열의 방향


제도 속의 균열


이 균열은 제도에도 고스란히 새겨져 있습니다.


TIPS(민간투자주도형 기술창업지원) 프로그램은 한국의 대표적인 스타트업 지원 제도입니다. 지원 조건의 첫 번째 항목은 지금도 '2인 이상의 팀원으로 구성된 창업팀.'입니다. 1인 창업자는 지원 대상이 아닙니다.

KAIST가 1인 창업가를 키우는 프로그램을 만들겠다고 나선 것과 국가 지원 제도가 여전히 '2인 이상'을 전제로 설계되어 있다는 것이 지금 동시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제도는 '조직은 여럿이어야 한다'는 전제 위에 서 있고 현실은 그 전제가 흔들리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거든요.


단순히 낡은 행정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형태의 일하기를 지원하고 어떤 형태는 지원하지 않는가는 결국 '우리는 조직을 어떻게 정의하는가'의 문제입니다. 그 정의 자체가 지금 흔들리고 있으니 제도가 따라잡지 못하는 건 어쩌면 당연합니다.


미지의 조직


이 균열이 어디를 향할지 아직은 모릅니다.

혼자서 팀의 일을 해내는 사람이 많아지면 지금의 팀 단위 조직이 좀 더 유연한 무언가로 대체될 수 있습니다. AI를 다루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의 격차가 벌어지면서 오히려 더 두터운 조직이 필요해질 수도 있습니다. AI를 잘 쓰는 시니어 한 명이 훨씬 많은 일을 처리하게 되면 조직 안의 분업 구조가 다른 방식으로 재편되는 방향도 있고요.


분명한 건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조직의 모양이 영원한 모양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코즈가 말했듯 조직은 조율 비용을 줄이기 위해 생겨났습니다. 조율 비용이 달라지면 조직의 모양이 달라지고, 지금 우리가 마주하는 AI가 그 비용을 바꾸고 있는 거고요.


미지의 그 형태는 아직 이름조차 없습니다. 지금 우리 내부에서 한창 일어나고 있는 이 일이 객관적으로 보이지는 않거든요. 그건 좀 더 시간이 지나야 할 것 같습니다.




고요했던 그날의 식탁


회사 일이 너무 바빠서 가족들 다 같이 가는 가족 여행을 못 가게 된 적이 있습니다.

몇 년만에 가는 가족 여행이라 너무나도 아쉬웠죠.

하지만 내심 와이프 없는 자유를 상상하며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습니다.


저녁 시간, 평소에 와이프가 질겁을 하던 요란한 요리 하나를 완성해서 식탁에 앉았습니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쫑알대면서 이야기하는 딸 아이 목소리도 없고,

음식 짜다고, 설거지 제대로 안 한다고 투덜대는 아내 목소리도 없는 그날의 식탁은 끔찍하리만치 고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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