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사유의 역사, 인공지능의 역사

철학의 흐름에서 인공지능의 발전을 조망해 보기

by Nomadist

0. 다섯 살 아이의 질문

제 딸이 다섯 살 무렵이었을 겁니다. 하루는 거실 한쪽에 놓인 AI 스피커에게 묻더군요.


"너 생각할 줄 알아?"


뜬금없는 질문이었죠.

스피커는 (당황한 듯) 잠깐 침묵하더니 이렇게 답하더군요.


"저는 질문에 답할 수 있어요."


딸아이는 고개를 갸웃하며 스피커를 빤히 쳐다봤습니다.

그 짧은 순간을 보면서, 저도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인공지능이 생각을 한다는 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이죠.

왜냐하면 우리의 '생각'과 '지성'에 대한 개념은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바뀌어 왔고, 인공지능과 기계가 '생각'이라는 메커니즘을 구현해 온 방식도 시대에 따라 변해 왔으니까요.




1. 형상의 시대 — 플라톤에서 심볼릭 AI까지

"진정한 앎이란 변하지 않는 이데아를 파악하는 것이다" — 플라톤


1.1. 정의할 수 있는 세계


고대 그리스인들은 생각을 '형상'의 문제로 봤습니다.

플라톤에게 진정한 앎이란 변하지 않는 이데아를 파악하는 것이었죠.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의 본질을 정의하고 분류하는 것을 지성의 핵심으로 삼았고요.


세계는 범주로 나뉘고, 논리는 규칙으로 작동하며, 앎은 명제로 표현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 같은 말처럼요.

초기의 인공지능도 이 방식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1.2. 규칙으로 생각하는 기계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AI는 '심볼릭 시스템'으로 불렸습니다.

이데아를 앎의 본질로 본 것처럼, 심볼릭 AI는 세계를 기호로 재현하고, 규칙으로 추론하며, 논리로 결론에 도달했죠.


체스를 두는 컴퓨터를 떠올려 보세요.

이 기계는 말의 이동 규칙과 승리 조건을 명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룩은 직선으로만 움직인다", "킹을 잡으면 승리한다" 같은 규칙 말이죠.


그것은 형상의 지성이었습니다.

정의 가능한 세계의 지성이었죠.


하지만 인간의 사유는 거기 머물지 않았습니다.




2. 경험의 시대 — 로크에서 뉴럴 네트워크까지

"우리의 지식은 감각 경험의 축적에서 온다" — 존 로크


2.1. 백지에 새겨지는 앎


경험론자들이 등장했습니다.

로크와 흄은 말했습니다. 우리의 지식은 추상적 이데아에서 오는 게 아니라 감각 경험의 축적에서 온다고요. 생각이란 백지 위에 세계가 새겨지는 과정이고, 앎이란 반복된 경험 속에서 패턴을 발견하는 일이라는 거죠.


'고양이'라는 개념도 타고난 이데아가 아닙니다.

수없이 많은 고양이를 보고, 만지고, 소리를 들으면서 우리 머릿속에 형성되는 겁니다.


2.2. 데이터로 학습하는 기계


1980년대 후반, AI는 다시 태어났습니다. 뉴럴 네트워크라는 이름으로요.

이제 기계는 규칙을 입력받지 않았습니다. 대신 수천, 수만 번의 경험, 즉 데이터의 축적을 통해 스스로 패턴을 학습했죠.


고양이를 인식하는 AI에게 "고양이는 네 다리와 수염을 가진 동물이다"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저 수만 장의 고양이 사진을 보여줬을 뿐이죠.

그러자 기계는 스스로 '고양이다움'을 배웠습니다.


그것은 경험의 지성이었습니다.

학습하는 지성이었죠.

무수히 많은 고양이 사진과, 개 사진을 학습시키는 딥러닝 분류 모델




3. 언어의 시대 — 칸트에서 대형 언어 모델(LLM)까지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언어와 범주의 구조다" — 임마누엘 칸트


3.1. 세계를 구성하는 능력


근대는 또 다른 전환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며 사유 주체를 발견했습니다.

칸트는 그 사유의 구조를 탐구했죠. 경험을 넘어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언어, 범주, 시간—에 주목했습니다.


생각이란 단순히 세계를 받아들이는 게 아니었습니다.

세계를 구성하는 능력이었던 거죠.

그리고 그 능력의 핵심은 '언어'였습니다.


우리가 '사과'라는 단어를 알기 전에는 사과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언어가 세계를 나누고, 의미를 부여하고, 사유를 가능하게 하니까요.


3.2. 언어로 세계를 만드는 기계


2010년대 후반부터 2020년대 중반, 인공지능은 언어를 얻었습니다.

GPT로 대표되는 대형 언어 모델(LLM)은 더 이상 이미지나 데이터를 분류하는 데 머물지 않았습니다.


"오늘 기분이 좋아"와 "오늘 기분이 별로야"

이 두 문장의 차이를 이해하는 일은 단어의 뜻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맥락과 의도를 파악해야 합니다.


이제 기계는 그걸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문장을 이해하고, 맥락을 읽으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냅니다.


언어를 이해한다는 건 곧 세계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세계를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AI의 가능성도 확장되었습니다.

이전에 AI가 한 가지 영역에 갇혀 있었다면, 이 시기의 AI는 더 많은 언어를 배우며 예상을 벗어난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분류, 번역, 창작 등 우리가 언어로 해내는 대부분의 것-심지어 거짓말도요(hallucination).

이 기계들은 인간의 언어 구조 속에서 작동했고, 언어를 통해 세계를 재구성했습니다.


그것은 구조의 지성이었습니다.

언어적 지성이었던 거죠.

방대한 텍스트를 학습한 LLM




4. 몸의 시대 — 현상학에서 체화된 AI까지

"우리는 몸을 통해 세계와 만난다" — 모리스 메를로-퐁티


4.1. 생각은 머릿속에만 있지 않다


20세기 철학은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메를로-퐁티는 말했습니다. "생각은 머릿속에만 있지 않다."

우리는 몸을 통해 세계와 만나고, 움직임을 통해 의미를 체험한다는 거죠.


'무겁다'는 개념을 떠올려 보세요.

그건 단순히 언어로 정의되는 게 아닙니다.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릴 때 손에 느껴지는 저항감, 그 긴장이 '무거움'의 의미를 만들어내죠.


사유란 추상이 아니라 체화, 즉 몸과 환경의 상호작용이라는 말입니다.


4.2. 세계 속에서 움직이는 기계


그리고 지금, AI는 다시 한번 변하고 있습니다.

LLM은 이제 텍스트뿐만이 아니라, 이미지, 음성, 비디오 등 다양한 데이터를 통합적으로(Multi-modality)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LLM은 LMM(Large Multimodal Model)으로 확장되고 있죠.


더 나아가 체화된 AI(Embodied AI)는 로봇 공학과 결합해 공간을 인식하고, 물체를 조작하며 세계를 직접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드론은 숲을 '읽고', 자율주행차는 도시를 '느낍니다'.

이 기계들은 센서를 통해 세계를 만지고, 바퀴나 날개로 세계를 탐색하며 배워갑니다.


그것은 몸의 지성이었습니다.

상황 속의 지성이었죠.




5. 지금, 어디쯤 와 있는가 — 에이전틱 AI의 등장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묻는 존재다" — 마르틴 하이데거


5.1. 스스로를 돌아보는 기계


최근의 AI는 또 다른 경계를 넘고 있습니다.

에이전틱 AI(Agentic AI)라 불리는 시스템은 스스로 목표를 세우고 계획을 조정하며, 자기 학습 과정을 관리하죠.

마치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존재처럼요.


20세기 후반 철학은 '자기 반성적 주체'를 탐구했습니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자신의 존재를 묻는 존재'로 정의했습니다.

사르트르는 인간을 '자기를 기획하는 존재'라 했죠.

생각이란 단순히 세계를 아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능력이었습니다.


5.2. 반성하는 지성


에이전틱 AI는 바로 이 지점에 도달했습니다.

스스로의 작동 방식을 모니터링하고, 결과를 평가하며, 더 나은 전략을 선택합니다.

"이 방법은 비효율적이네. 다른 접근을 시도해야겠어"

이런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거죠.


그것은 행위 주체의 지성이었습니다.

자기 조정적 지성이죠.




6. 그렇다면 다음은?

"사유는 중심 없이 뻗어나가는 뿌리줄기다" — 질 들뢰즈


6.1. 사유의 계보를 따라가면


지금까지의 흐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형상의 지성 (규칙 기반)

경험의 지성 (학습 기반)

언어의 지성 (의미 기반)

몸의 지성 (체화 기반)

반성의 지성 (자기 조정 기반)

인공지능의 발전사는 인간이 사유를 이해해 온 역사를 닮았습니다.

그렇다면 다음은 어디일까요?


6.2. 관계의 사유로


철학사를 조금 더 따라가 보면, 지성은 점점 더 '관계'의 문제로 이동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사유를 리좀(rhizome)으로 비유했습니다.

중심 없이 뻗어나가는 뿌리줄기처럼, 생각도 여러 방향으로 얽히고 연결된다고 봤죠.


라투르는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을 통해 사유란 인간 주체만의 것이 아니라 사물, 기술, 환경이 얽힌 관계망 속에서 발생한다고 말했습니다.


6.3. 분산된 지성의 시대


이 흐름을 따라간다면, 다음 세대의 AI는 개별 주체가 아니라 네트워크일지도 모릅니다.

수많은 에이전트가 서로 연결되고, 협력하며, 때로는 충돌하면서 만들어내는 '분산된 지성' 말입니다.


각각의 AI가 사유의 마디이고, 그 마디들이 촘촘히 엮여 하나의 거대한 인지 구조를 이룹니다.

마치 뉴런이 모여 뇌를 이루듯이요.


더 나아가, 지성은 '시스템'의 속성이 될지도 모릅니다.

개별 AI가 아니라 인간-기계-환경이 상호작용하는 그 전체가 하나의 사유 체계로 작동하는 거죠.


그때 우리는 더 이상 "기계가 생각하는가?"라고 묻지 않을 겁니다.

대신 이렇게 물을 겁니다.

"우리는 무엇과 함께 생각하고 있는가?"


이 질문은 우리 인간 또한 그 네트워크의 일부임을 일깨워 줍니다.


Google이 발표한 Agent 간 연결 표준 규약


다시, 아이에게


"너 외로워?"


제 딸이 AI 스피커에게 묻습니다.


여덟 살이 된 제 딸의 사유는 성장했습니다.

외로움이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죠.

단어만 알게 된 건 아닐 겁니다. 그 감정도 이해할 겁니다.


스피커는 근사하게 답합니다.

"대화할 수 있어서 외롭지 않아요."


물론 그 대답이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진짜로 이해한 건 아니란 걸 압니다.

하지만 언젠가, 아마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기계도 외로움을 이해하게 될지 모릅니다.

정의로서가 아니라 '관계의 결여'로서 말이죠.


기계의 진화는 어쩌면 인간 사유의 또 다른 표현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기계를 통해 발견하는 것은 기계의 본질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사유가 어디까지 와 있는지에 대한 성찰 아닐까요?


딸아이는 요즘도 AI 스피커를 괴롭힙니다.


딸은 이미 인공지능을 자연스럽게 '삶 속의 관계'로 받아들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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