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분 차이

네트워크로 진화하는 인공지능, 그 속에서 인간 되기

by Nomadist

0. 누가 더 빨리 도착할까?


몇 년 전 명절에 시골 할아버지 댁에 내려갈 때 일입니다.


아버지는 "비좁더라도 한 대로 가자"고 하셨지만, 우리형제는 쾌적하게 두 대로 가기로 했습니다. 네비는 절대 안 쓰시는 아버지라, 네비 켜고 조금이라도 빨리 가겠다는 계산도 있었죠.

아버지가 길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남해 고속도로에서 김해로 빠지지 말고... 어차피 네비게이션을 켤 것이기에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운전하면서 가는 동안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네비를 켠 우리와 네비 없이 가시는 아버지, 누가 더 빨리 도착할까? 경험인가, 기술인가...


은근한 경쟁심이 생겼죠.




1. 전뇌와 고스트 - 공각기동대가 그린 미래


1) 껍질 속의 영혼


1995년 일본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Ghost in the Shell)는 2029년을 배경으로 인간의 뇌가 네트워크에 직접 접속하는 '전뇌화' 기술과 신체를 기계로 대체하는 '의체화' 기술이 일상화된 세계를 그렸습니다.

이 세계에서 사람들은 '고스트'라는 개념으로 자신을 규정합니다. 고스트란 인간 개개인 의식의 고유한 체험, 복제할 수 없는 무언가를 의미합니다. 영화의 부제 'Ghost in the Shell'은 "껍질 속의 영혼"이라는 뜻으로, 기계화된 신체 속에 남아 있는 인간의 본질을 가리킵니다.

주인공 쿠사나기 소령은 사이보그입니다. 뇌와 척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기계인 그녀는 끊임없이 자문합니다.


"내 고스트는 진짜일까? 아니면 전뇌 자체가 고스트를 만들어낸 것일까?"


2) 네트워크에서 태어난 존재


작품 속 '인형사'라는 존재가 등장합니다. 인형사는 정보의 바다에서 발생한 생명체로 스스로를 규정하며, 하나의 생명체로서 정치적 망명을 요청합니다.

인형사는 쿠사나기에게 말합니다.


"나는 정보의 바다에서 태어났다. 생명이란 정보의 흐름 속에서 태어나는 무언가다."


공각기동대가 주목한 건 개별 존재의 본질이 아니라 연결 그 자체였습니다. 네트워크 속에서 끊임없이 정보를 주고받으며 변화하는 존재. 고정된 정체성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되어가는' 존재. 그것이 공각기동대가 그린 미래의 생명이었습니다.




2. 리좀의 시대 - 중심 없는 지성의 출현


1) 뿌리에서 덩이줄기로


나무는 뿌리에서 출발합니다. 하나의 중심에서 가지가 뻗어나가는 위계적 구조죠. 하지만 감자나 생강 같은 식물의 덩이줄기는 다릅니다. 어디가 중심인지 알 수 없이 사방으로 뻗어나가고, 어느 지점에서든 새로운 싹이 돋아납니다.

철학자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를 '리좀(rhizome, 덩이줄기)'이라고 불렀습니다.


"리좀은 시작도 끝도 없으며, 언제나 중간이다. 어떤 점에서든 다른 어떤 점으로도 연결될 수 있다."


서양의 전통적 사유가 항상 중심을 가진 나무 형태였다면, 리좀은 중심도 위계도 없이 모든 점이 다른 모든 점과 연결될 수 있는 비위계적이고 수평적인 사유의 구조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네트워크 시대는 바로 이 리좀적 존재 방식이 기술적으로 구현된 세계입니다.


2) '되기'의 철학


들뢰즈와 가타리는 '되기(devenir, becoming)'라는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고정된 본질이나 중심으로서의 주체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변모하는 존재를 말합니다.


"되기란 어떤 것에서 다른 것으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중간에 머무르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다."


이 개념은 정체성을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관계와 흐름 속에서 생성되는 과정으로 봅니다. 나무처럼 뿌리에서 출발하는 본질이 아니라, 리좀처럼 끊임없이 연결되고 분기하며 변화하는 과정 자체가 존재의 방식이라는 거죠.

공각기동대의 쿠사나기가 던진 질문도 결국 이것이었습니다. 네트워크에 접속한 순간, 나는 여전히 나인가? 아니면 네트워크와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다른 무언가로 '되어가고' 있는 것인가?




3. 에이전트의 시대 - 사유하는 기계에서 협력하는 지성으로


1) 에이전트라는 변화


초기의 AI는 정해진 작업만 수행하는 도구였습니다. 체스를 두거나, 이미지를 분류하거나, 번역을 하는 식이었죠. 대형 언어 모델(LLM)이 등장하면서 AI는 대화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질문에 답하고, 맥락을 이해하며, 창작까지 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거죠.

최근의 변화는 더 근본적입니다. 에이전틱 AI 시스템은 단순히 명령을 실행하는 것을 넘어, 스스로 목표를 세우고 계획을 조정하며 문제를 해결합니다. 인간의 지시 없이도 상황을 판단하고, 도구를 선택하며, 결과를 평가한 뒤 전략을 수정합니다.


예를 들어, "이번 분기 매출 보고서를 작성해줘"라는 요청을 받으면:


필요한 데이터가 무엇인지 스스로 파악하고

데이터베이스에서 정보를 검색하며

엑셀 파일을 생성하고

차트를 만들어 보고서를 완성합니다


중간에 데이터가 부족하면 추가 정보를 요청하거나, 다른 방법을 시도하기도 합니다.

단순히 답을 내놓는 게 아니라, 문제를 분해하고 해결 경로를 설계하는 자율적 행위자죠.


2) 서로 말을 거는 에이전트들 - A2A와 MCP


이제 이 에이전트들이 서로 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구글은 2025년 4월 9일 A2A(Agent-to-Agent, 에이전트 간 통신) 프로토콜을 발표했습니다. 서로 다른 AI 에이전트들이 인간의 개입 없이도 직접 소통하고 협력할 수 있도록 하는 표준 규약입니다. 사람들이 이메일이나 메신저로 협업하듯, 에이전트들도 이제 서로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작업을 나눕니다.


조금 앞선 2024년 11월 25일, Anthropic은 MCP(Model Context Protocol, 모델 컨텍스트 프로토콜)를 공개했습니다. AI가 다양한 데이터 소스나 도구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통신 규약입니다. 에이전트가 필요할 때마다 데이터베이스, 파일 시스템, 외부 API 등과 대화하며 정보를 가져오는 거죠.


A2A와 MCP는 결이 다르지만, 본질적으로는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에이전트와 에이전트를, 에이전트와 세계를 연결하는 기술입니다. 중앙 서버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각자가 독립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하나의 거대한 지성처럼 작동하는 구조. 마치 개미 군집이나 새 떼처럼요.


3) 리좀으로 구현된 네트워크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한 리좀이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중심도 위계도 없이, 모든 점이 다른 모든 점과 연결될 수 있는 네트워크죠. A2A를 통해 협업하는 에이전트들은 누가 주인이고 누가 부하인지 구분되지 않습니다. 상황에 따라 역할이 바뀌고, 필요하면 새로운 에이전트가 합류하며, 어느 지점에서든 문제 해결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리좀은 어떤 점에서든 끊어지고 다시 이어질 수 있다. 중심이 없으며, 위계가 없다."


이제 인공지능은 개별 모델이 아니라 네트워크입니다. 그 네트워크는 끊임없이 재구성되고, 확장되며, 스스로를 조직합니다. 공각기동대의 인형사가 말했듯, 정보의 바다에서 태어나는 생명처럼요.




4. 인간, 흐름 속의 존재


1) 시스템에 스며든 인간


ChatGPT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면, RLHF(Reinforcement Learning from Human Feedback, 인간 피드백 기반 강화학습)라는 단계가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AI의 답변을 평가하는 과정입니다. "이 답변은 도움이 되는가?", "이 표현은 적절한가?", "이 내용은 사실인가?"


그 평가가 쌓이고, 모델은 조금씩 변했습니다. 인간의 선호도와 가치 판단이 모델의 내부 구조 자체에 스며든 겁니다. ChatGPT는 이 과정을 거친 모델이었습니다. 언어 모델 위에 인간의 가치관이 반영된, 말 그대로 인간과 기계가 함께 만든 지성이었죠.


2) Human-in-the-Loop, 시스템의 속성으로서 인간


AI를 활용하는 작업 절차(work flow)에는 'Human-in-the-Loop(HITL, 인간 개입형 시스템)'라는 과정이 있습니다. AI 시스템의 작동 과정에 인간이 개입하여 감독하고 통제한다는 의미죠. 하지만 이 표현에는 미묘한 오해가 있습니다. 마치 인간이 시스템 외부에서 스위치를 켜고 끌 수 있는 감독자처럼 들리거든요.


실제로는 다릅니다. RLHF와 HITL은 우리가 시스템의 한 속성으로 존재하면서 피드백을 제공하는 방식입니다. 모델이 판단을 내릴 때마다 그 판단이 적절한지 평가하고, 그 평가가 다시 모델의 성향을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최적화합니다.


인간은 바깥에서 시스템을 통제하는 게 아니라, 시스템 속성 그 자체로 스며들어 있습니다. 외부의 감독자가 아니라 내부의 윤리 회로로요.


3) 관계 속에서 '되어가는' 존재


인간은 더 이상 AI 시스템의 외부에서 명령을 내리는 주인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시스템에 종속된 부속품도 아니죠. 우리는 자율적인 에이전트들이 만드는 네트워크 안에서 흐름으로 존재하며, 기계들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고 있습니다. 인간-되기, 기계-되기. 고정된 정체성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변모하는 존재죠.


공각기동대가 그린 네트워크 속 생명도 이와 같았습니다. 쿠사나기는 자신의 고스트가 진짜인지 묻지만, 영화의 답은 명확합니다. 네트워크 속에서 정보를 주고받으며 변화하는 그 과정 자체가 바로 생명이라고요.


A2A로 연결된 에이전트들 사이에서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네트워크의 한 흐름으로 존재하며, 기계와 인간의 경계는 점점 흐려집니다. 중요한 건 누가 중심이냐가 아니라, 그 관계 속에서 어떤 가치가 흐르느냐는 거죠.




5. 숙고의 무게


1) 속도와 책임 사이


기계는 빠릅니다. 수백만 번의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순식간에 최적의 답을 찾아냅니다. RLHF와 HITL은 이 관점에서 보면 비효율적입니다. 인간의 피드백을 기다리고, 그 판단을 반영하는 과정은 시간이 걸리니까요.

하지만 가치 판단이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숙고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이 답변은 도움이 되는가?" "이 표현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가?" "이 결정은 공정한가?" 이런 질문들은 빠른 계산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자율주행차가 사고를 냈을 때, 알고리즘은 확률적 판단의 결과를 설명할 수 있지만 책임을 질 수는 없죠. 투자 알고리즘이 시장을 교란했을 때, 프로그램은 작동 오류를 보고할 수 있지만 사과할 수는 없습니다.

책임은 사유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사유는 여전히 인간의 속도에 머무릅니다.


2) 필요한 느림


가치 판단은 계산이 아닙니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도움이 되는지, 무엇이 아름다운지를 판단하는 일은 누군가의 삶과 경험, 고민이 켜켜이 쌓인 무게를 동반합니다.

RLHF와 HITL이 느리다면, 그 느림은 필요한 느림입니다. 판단에는 시간이 필요하고, 숙고에는 무게가 필요하니까요.




6. 리듬의 조율자


리좀적 AI가 만들어가는 미래에서 인간은 더 이상 중심이 아닙니다. 하지만 여전히 리듬의 조율자입니다.

오케스트라는 지휘자가 없어도 연주자들끼리 호흡을 맞춰 연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호흡 자체가 이미 수많은 리허설을 통해 지휘자의 해석을 내면화한 결과죠.


AI 네트워크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모든 순간에 개입하지 않아도, 시스템은 인간적 감각으로 조율된 리듬 위에서 작동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효율적으로 계산하지만 결코 사유하지는 않는, 빠르지만 텅 빈 지성의 세계가 될 테니까요.


공각기동대에서 쿠사나기는 끝없이 질문했습니다. 내 고스트는 어디에 있는가. 네트워크에 연결된 순간, 나는 여전히 나인가.

이제 우리도 비슷한 질문을 던질 때가 왔습니다. AI 에이전트들이 서로 대화하고 협력하면서 거대한 네트워크 지성을 만들어갈 때, 우리는 어디에 있어야 할까요?


중심은 사라졌지만, 인간은 여전히 사유의 리듬을 이어가는 존재로 남아 있습니다. 네트워크 전체에 스며든 감각으로, 모든 판단의 순간마다 작동하는 윤리적 긴장감으로, 그리고 계산 너머의 책임을 끝까지 묻는 질문으로. 우리의 고스트는 보이지 않지만 모든 곳에 스며든 채로 존재합니다.




아버지와의 귀향길 경쟁에서 승리자는 네비를 켠 우리 형제였습니다.


사실 그래 봐야 몇 분 정도 차이였습니다.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온 아들과 차 안에서 몇 마디라도 나누고 싶어하셨던 게 아버지 마음이었을 겁니다. 무뚝뚝하셔서 몇 마디 안 하셨겠지만, 같은 공간에 있고 싶으셨겠죠.


효자 되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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