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나가면 고생이지

18살의 내가 40대 후반인 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by 노연석

1991년 6월 초여름, 나는 수업도 없는 학교를 의미 없이 등교를 하고 있었다. 몇 안 되는 친구들과 함께 학교에 하는 것이라고는 자습뿐이었다. 우리는 이런 학교 생활이 점점 지루해지고 무료해지기 시작했다.

현장실습을 나간 다른 친구들처럼 우리도 학교를 벗어나기 위한 현장실습을 보내 줄 것을 선생님께 요청드렸다. 선생님들도 특별히 우리에게 해 주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흔쾌히 승낙을 해 주시고 현장학습을 나갈 회사를 알아봐 주셨다.


고3, 다른 친구들은 대학에 가겠다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을 시기 나는 산업의 현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내 나이 아직 생일이 지나지 않아 18살이다. 만으로는 17살이다. 내가 무료한 학교 생활을 해야 했던 건 내 진로는 이미 정해져 있었고 11월까지 놀고먹으며 시간을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교와 집에서 탈출을 위한 현장실습을 택했다.


현장학습을 가게 된 곳은 군포시 당정동. 전기밥솥을 만드는 회사이다. 한때 유명했던 밥솥 회사의 자회사로 자체 브랜드 있지만 모회사의 밥솥을 생산하기도 했고 그때 당시는 흔하지 않은 식기 세척기도 생산하기도 했던 회사이다.

그 회사가 아직 살아 있는지 인터넷에 찾아보니 2010년 기사 후 다른 기사들을 찾아볼 수 없고 회사 홈페이지도 조회가 되지 않다. 폐업을 한 것일까? 다트(DART)에 찾아보니 사명이 변경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장수하는 회사인 걸 보면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한 것 같다.


나는 그곳에 학교 친구 2명과 같이 가게 되었다. 낯선 도시에서 사회로 첫 발. 우리는 그곳에서 제공하는 숙식을 제공받으며 생활을 했고 일하는 만큼 돈을 주는 것인지도 모른 채 우리는 지시한 일들을 해 나갔다.


우리가 하는 일은 길게 늘어선 생산라인에서 한 가지 일을 반복해 내는 일이다. 주로 제품에 립을 위한 나사못을 끼우는 일이다.


매일 아침 출근 시간에 출근 도장을 찍는다. 요즘은 보기 힘들지만 예전에는 내 이름으로 된 종이 출퇴근 카드를 위에서 집어넣으면 출퇴근 시간을 카드에 찍어 주었으며 이 카드 한장이 나의 월급과 연장 근로 수당을 받을 수 있게 해 준다.


디지털 세상에 이런 아날로그 방식의 출퇴근 기록기를 사용하는 곳이 많지는 않겠지만 쇼핑몰에 판매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직 사용하는 곳이 있다는 것이다.


사무실에 이런 기계가 있으면 재미 있을 것 같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피곤은 몸에 누적되어 갔다. 한 번은 밥솥이 아닌 식기 세척기를 조립하던 시기였는데 지금은 부품들이 잘 만들어져 나오겠지만 그때만 해도 뭔가 틀이 잘 맞지 않아 힘으로 누르고 조이 고를 해야 했다. 마치 최근에 현대자동차에서 발로 단차를 맞추는 것처럼 비슷한 상황인데 손가락으로 해야 하다 보니 손이 엉망이 되었다. 어느 날 내 엄지 손가락은 심하게 부어올랐고 고름이 가득 차 있었다.


병원에 가는 것이 맞겠지만 상황이 병원에 가기 어려운 상황이라 약국에 들려 약사에게 처방을 받고 약을 먹었지만 호전되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 이해가 되지 않지만 나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내 손이 그 상태가 된 것만큼 그 무렵 그 공장의 직원들의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알바 같은 우리는 우리는 그저 시키는 대로 일을 할 뿐이라 힘들어도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지내고 있었으나 직원들은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직원 중 한 명이 우리를 불렀고 그들이 회사를 상대로 한 활동에 대해 전달해 주었다. 그건 내일 파업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다음날 우리는 출근을 하지 않았다. 공장 인력의 절반 이상이 출근을 하지 않아 공장은 가동되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그때 직원들 중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만 그 파업에 참여를 했었고 그것이 파업이라고 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회사를 향해 집회를 하고 요구하는 활동을 한 것이 아니라 그냥 출근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파업에 참여한 사람들 모두 여의도 한강둔치로 모였다.


그런데, 그곳에 모인 사람들 모두 돈이 없었다. 군포에서 여의도를 왕복할 차비 외에는 돈이 없었다. 돈이 없는 이유는 막노동이나 다름없는 일을 마치고 나면 사람들은 회사 근처 술집으로 향했다. 벌어 들이는 돈은 모두 주변 술집에 모두 퍼다 주는 것 같았다.

그때는 심지어 외상까지 해 줄 때라 월급날이면 사람들은 외상을 값으로 술집으로 향했고 또 한잔을 기울이곤 했었다. 그러니 주머니에 돈이 있을 날이 없다. 그곳에선 나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아침도 걸렀는데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배속이 요동을 치기 시작한다.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이 얼마나 배가 고프겠는가. 우리는 여의도 지하철 역사 근처에서 헌혈 버스를 발견하고 협상을 시작했다. 20여 명이 되는 인력들 모두 헌혈을 할 것이고 우리 사정이 이러니 초코파이를 좀 많이 달라고 이야기했다. 협상이라기보다는 부탁이었다.

우리의 사정을 알아차린 그분들은 고맙게도 허락을 해 주셨고 우리는 초코파이를 들고 한강둔치로 가서 남아 있는 돈을 털어 사발면 몇 개를 사서 허기진 배를 채웠었다.


오후 4시쯤 회사와 연락이 왔다. 요구사항을 들어줄 테니 빨리 돌아오라는 것이다. 우리는 오래 버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회사로 돌아왔다. 회사는 식당에서 식사부터 할 수 있게 배려를 해 주었다.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날 파업을 주동했던 정직원 분들은 그들의 요구사항을 회사에 전달했고 회사는 요구사항을 들어 주기로 협의가 되었다. 사실 나의 관심 사항은 아니 였기 때문에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근무 시간에 관한 사항이었을 것이다. 초과 근무가 많기 때문에 그때도 워라밸을 지키기 위함이었던 것이 아녔을까.


그곳에서의 생활은 2개월 만에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직원들이 왜 회사를 상대로 파업을 하는지 두 달이 지나고서야 알게 되었다. 그 시절은 지금처럼 근무의 통제가 없을 때이고 회사는 그후로도 직원들을 마음껏 부렸다. 회사의 약속은 여전히 잘 지켜지지 않았다.


짧지만 두 달 동안 난 새로운 세상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고 헤어졌다. 그 후로 그들은 만난 적은 없다.

그대 그들이 기억도 나지 않아 만나도 알아 보지 못할 것이다.


열여덟 살의 기억,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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