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안에 있는 시설 중 가장 관심이 갔던 곳은 다름 아닌 전산실이었다. 이 전산실에는 여러 대의 8비트 컴퓨터가 있었다. 컴퓨터로 할 수 있는 일이 어떤 것이 있는지 잘 몰랐지만 가끔 선생님들은 전산실내에서도 안쪽 사무실에서 성적 처리를 하고는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컴퓨터를 좀 할 줄 아는 친구는 선생님의 성적 처리를 도와주고는 했는데 성적에 대해선는 정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혼자만 알고 있었다.
전산 부원이 되다.
1학년 말쯤이었을까? 죽이 맞아서 지내던 친구의 꼬임에 넘어가서 나는 전산부에 들어갔다.
"야, 너도 전산부에 들어와"
"전산부? 내가 들어가도 될까?"
"그럼, 아무나 들어올 수 있어."
아무나 들어갈 수 있지만 아무나 잘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지만 나는 그래도 꾸준히 전산실을 방문하고 잘 맞지는 않지만 그래도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으로 도전을 했었지만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
그곳에는 선배들도 있고 친구들도 이미 많이 가입해서 활동 중에 있었는데 그중에는 컴퓨터를 정말 잘하는 친구들이 꽤 있는 것 같았다. 나와는 다른 세상의 사람들처럼 보였다.
전산실에 가면 선배들이 코딩 교육을 해 주었다. 물론 교육이 끝나면 풀어야 할 과제는 늘 주어졌다. 사실하지 않아도 그만이지만 그럴 수만은 없었다. 덕분에 나는 매일 막차를 타고 집으로 귀가를 하곤 했었다.
나보다 한참을 먼저 들어온 친구들은 컴퓨터에 이미 익숙해져 있는 것 같았다. 지금처럼 게임을 할 수도 없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코딩 밖에 없는 컴퓨터라고 생각했는데, 한 친구는 게임을 만들어서 할 정도니 혀를 내두르는 능력자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친구는 뭔가 코딩을 하고 나면 네모난 것을 컴퓨터에 꽂고 무언 가를 하는 것이었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코딩한 것을 저장을 해 가는 것 같았다.
그게 저장매체라는 개념이 없던 때이기에 코딩한 것을 저장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도 못했고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아마도 그 친구는 집에 컴퓨터가 있었던 것 같다.
왜 이런 코딩이라는 것을 하는 건가요?
그때 풀어보라고 내주는 과제의 수준은 이런 것이었다.
문자를 출력해서 피라미드 그리기, 역 피라미드 그리기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그때는 코딩의 개념이 없다 보니 한동안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실 왜 이런 것을 시켰을까 생각을 해 보니
IF, For문 같은 개념을 익히게 하려고 이런 문제를 내줬던 것 같다.
이런 것들을 화면에 출력하는 프로그램을 했던 것 같다.
그러니 얼마나 재미가 없었겠는가?
시간이 지나면서 성적 계산하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단계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를 되었다. 이 문제를 내준 이유는 배열의 개념을 익히게 하려던 의도였지만 난 코딩을 하면서도 이런 개념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때는 데이터베이스도 없었고 성적 하나하나를 프로그램에 하드 코딩하듯이 입력을 하여 계산해서 화면에 출력을 하지만 내 기억에 코딩한 것을 저장할 만한 매체가 없어서 늘 일회성으로 만들고 다음날 처음부터 또 같은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을 반복하고는 했었던 것 같다.
지금이야 이런 코딩을 할 일도 없지만 그때는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쉽지 않았던 것에는 이유가 있는데 그다지 흥미를 갖지도 못했고 의욕만 강했던 것 같다.
학교는 남녀공학이라 전산부에는 여자 아이들도 몇몇 있었는데 이 친구들도 나름 잘한다는 것을 수업시간 선생님 칭찬으로 알 수 있었다. 다른 친구들이 선생님에게 칭찬을 받고 선생님의 일을 도울 정도로 잘하고 경진대회도 나가는 친구들의 그늘 아래서 나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전산부에서 존재감 없는 사람으로 재능도 없는 한 사람으로 늘 주눅이 들어 조용히 지냈던 것 같다.
전산 자격증이 취득을 위한 도전
전산부를 하면서 자격증 취득을 위한 공부도 했었다. 그때는 고등학생이 볼 수 있는 소프트웨어 분야의 자격증으로는 정보처리기능사 2급 밖에 없었다. 이론 시험, 필기시험을 통과해야 하는데 이론은 어떻게든 하겠는데 실기문제는 늘 걱정이었다.
이론 시험에는 책을 6번이나 봐 가면서 아주 가볍게 합격을 했었다. 그 후로 실기 연습을 했지만 실기 시험 3번의 기회만에 결국 취득을 하지 못했고, 다시 이론 시험을 보고 합격을 했지만 더 이상 실기시험은 보지 않기로 결정을 했었다.
생각해 보면 7번 읽기 공부법과 비슷한 걸 한 것 같은데 그때는 6번 책을 보니 거의 다 외울 수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은 열 번을 봐도 안 되겠지만...
정말 다른 건 다 잘할 수 있는데 이건 정말 넘사 벽이었다. 실기시험이라고 해도 지금처럼 컴퓨터로 코딩을 하는 것도 아니고 필기시험처럼 시험지에 주어진 코딩 문제에 빈칸 채우기 같은 간단한 문제임에도 나는 풀어내지 못했다.
시험은 학교가 있는 소재지에서 볼 수 없어서 늘 춘천까지 시험을 보러 가야 했고 대부분 시험이 아침 일찍 있다 보니 1박 2일 코스도 다녀와야 했다. 아침 일찍 춘천으로 가는 버스가 없기 때문에 시험을 볼 때마다 숙박을 늘 해야 했다.
시험이 있는 곳으로의 일탈 그 이름은 여행
세 번째 시험을 보러 가던 날, 우리는 학교 근처에 있는 버스 터미널에 모였다.
"시험공부 많이 했어"
나를 전산부로 끌어드린 그 친구가 물었다.
"하긴 했는데, 난 왜 이걸 하는지 아직도 모르겠어."
"그래도 열심히 했으니 잘 될 거야"
친구는 나에게 격려를 해 주었지만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속으로는 '너는 잘한다고 걱정이 없겠지'라고 생각을 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그 이야기를 내뱉는 순간 내가 너무 작아질 것만 같았다.
춘천 가는 버스는 길은 험난하기도 하지만 자주 있지도 않아 시험 보는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이동을 했었다. 시간도 2시간 반이상 걸렸던 것 같다. 버스는 시내를 떠나 아슬아슬한 비포장 도로의 절벽길 같은 산을 넘어 창밖으로 펼쳐진 화천의 감자밭을 보며 '정말 많구나'라고 생각할 정도였고 그래서 강원도 하면 감자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 이해가 가게 시작했다. 그렇게 화천을 거쳐서 춘천에 도착하는 코스다.
지금은 지도를 검색해 보니 코스에 많은 변화는 없는 것 같은데 시간은 반도 걸리지 않는 것을 보니 길이 많이 좋아진 것 같다.
시험 보는 사람들은 모두 모여 버스도 같이 타고 갔지만 숙박도 단체로 숙박을 했다. 나름 선생님께 딴 길로 새지 말고 잘 인솔하라고 명을 받은 선배가 있지만 다 같은 학생이다. 시험을 보러 갔지만 오랜만에 촌놈들이 도시로 나왔으니 시내 구경도 하고 영화도 보러 다니곤 했다.
아마도 부모님들은 춘천에 가서도 열심히 공부하고 시험을 치르고 온 줄 알고 계시지만 일탈을 위한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고 누구도 다 같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비밀이라면 비밀이지만 어떤 날은 술 한잔씩 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나는 그 친구들에게 술이라는 음료의 맛을 배운 것 같다.
춘천에는 시험기간이면 이렇게 강원도 각지에서 시험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많고 이런 유사한 상황은 흔하게 있는 일이었다. 가끔은 다른 학교 아이들과의 충돌도 있기는 했지만 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지막 실기 시험, 마지막 기회라 놀러 다니고 싶지 않았지만 혼자만 공부를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춘천에도 서울의 명동과 같은 명동이 있다. 서울에 있는 명동만큼은 아니지만 여기도 꽤나 젊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춘천에서는 유명한 곳이다. 명동은 춘천을 가면 언제나 들러야 하는 코스였다. 시장 구경을 하고, 밥도 먹고, 영화도 보며 공부는 뒷전으로 한채 놀다가 숙소에 느지막이 들어갔다. 공부는 이미 물 건너갔고 너무 많이 돌아다니다 보니 금방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결과는 예상했지만 마음은 아프다.
자신이 없는 시험은 역시 잘 볼 수 없었다. 전날 놀러 다녀서가 아니라 나에게 늘 넘사벽 같은 것들이 있는데 전산은 그중에 하나였다. 그냥 이번은 친구들과 여행을 다녀온 것을 만족해야 했다. 어쩌면 시험을 빙자한 친구들과의 여행이 목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시험을 보고 온 후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고 결과 발표의 날이다. 내 이름은 역시 합격자 명단에 없었다. 다른 친구의 합격소식에 축하는 해 주었지만 마음이 쓰리기도 하고 배가 아프기는 했다. 그래서 나는 다른 것에 더 집중하기로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