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안갯속에서 나를 찾아가는 나침반이다.

보일 듯 말 듯

by 노연석

집을 나서자 눈앞에 펼쳐져 나를 반기는 것은 짙은 안개였다. 눈앞이 캄캄했다. 아니 눈앞은 하얗지만 캄캄함과 다를 바 없었다.


반갑지 않은 안개, 안갯속 저 건너편에 내가 가야 할 목적지는 변하지 않는다. 그곳으로 가지 못하겠다고 억지를 부릴 수도 없다. 어느 때보다 더딘 발걸음이겠지만 그래도 그곳으로 향해 나아가야 한다.


짙은 안개는 세상의 모든 사물들을 집어삼켰지만 반경 수 미터 내의 사물들은 희미하게나마 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일말의 희망.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이었다면 이런 희망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안개는 희망이다.


그런 줄 알았다.


언젠가 시골에 가야 해서 새벽에 집을 나섰다. 태어나서 이렇게 지독한 안개를 본 적이 있었던가?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아니, 그날이 최악의 날이었다. 그러나 멈추거나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안개는 시골까지 가는 길 내내 계속되었고 나는 반경 수 미터 내의 도로를 내다보며 거북이처럼 기어가야 했다. 라이트가 비치는 몇 미터 앞이 보이지만 그 이상은 내가 가진 능력으로는 전혀 볼 수 없기에 온갖 촉각을 다 세워 감으로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전진했었다. 그 시간 동안 모든 감각 기관은 초 비상이 걸려 버리며 예상치 못할 상황에 대비하는 상태를 유지하며 액셀 페달을 조심스럽게 밝으며 나아갔다. 운전대에 올린 손은 잔뜩 힘이 들어가 경직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초보운전 시절의 몸 상태가 되어 버렸다. 그래도 조금씩 앞으로 전진을 할 수는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큰 성과였다.


그날의 현실이 안개가 아니라 어둠이었다면 어땠을까?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고 가정한다면 차에서 쏟아지는 빛은 안개보다 더 먼 거리의 가시거리를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개는 달랐다. 코앞의 현실만에 충실하게 하는 감옥과 다르지 않았다. 헤어 나올 수 없는 최악의 조건이란 걸 어리석게도 겪어 보고 나서야 알았다.


삶에 가끔 찾아오는 안개도 다르지 않았다. 한걸음의 발도 내디딜 수 없는 만큼의 공포를 가져다주었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길을 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나는 할 수 있을까? 정말 할 수 있을까? 언제나 시작은 그런 걱정과 두려움에서 시작이 되었다.


그 두려움은 한걸음 내딛기 위한 수많은 구실이 필요하다. 어떻게라도 한 발을 떼기 위한 동기가 필요하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한다. 속담처럼 한걸음을 떼는 것 만으로 일의 절반은 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 시간들은 더 잘 달릴 수 있도록 준비를 하는 워밍업의 시간이 되어 준다. 어느 누구에게도 워밍업 없는 무모한 출발은 몸에 무리를 주기 마련이다. 사람이 아닌 자동차조차 워밍업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야 끝까지 가고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다고 포기할 필요도 없고 불가능할 것이라는 편견을 가질 필요도 없다. 시작이 어설프고 미약할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가다 보면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 찾을 수 있고 한발 한 발의 걸음마에 가속도가 붙어 뛰어갈 수 있게 된다. 그러다 보면 생각보다 멀리 와 있음을 알아차리는 순간이 온다.


안갯속으로 들어가 보면 안개 밖에서 우려하던 일들이 쓸데없는 망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조금 답답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속에 뛰어들어보면 누구나 길을 찾을 수 있다. 내 우려가 쓸모없는 망상이었음이 증명될 것이다.


안갯속에 일단 두 눈 꼭 감고 한 걸음만 내디뎌 보자.


보이지 않을 것 같던 세상이 조금씩 밝아지고, 시간은 노력한 대가의 고마움으로 따사로운 햇살로 안개를 부수어 버린다. 포기하게 만들려 했던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고, 시간이 지나면 증발해서 사라지는 물 분자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짙은 안갯속에서는 모든 것이 흐릿하지만 더 집중해서 보게 된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아내기 위해 평소와 다른 시각과 촉각으로 사물을 대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강요를 하거나 강제하지는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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