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거짓말

커튼콜

by 노연석

어떤 사유로도 선한 거짓말이 용납될 수 있을까?


커튼콜이라는 드라마, 시한부로 죽음을 얼마 두지 않은 92세의 돈 많은 회장 할머니, 그녀의 죽기 전 유일한 소원은 북에 남겨두고 온 가족들 중 유일한 생존자인 손주를 만나는 것이다.


회장 인 할머니를 보살피는 박 실장은 얼마 남지 않은 그녀의 생에 마지막 소원의 선물을 하고자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손주를 찾지만 결국 포기하고 극단의 연기자를 손주로 둔갑시킨다. 찾고 있던 손주가 너무 폭력적이고 난폭하다는 것을 알고 그런 손주를 앞에 데려다 놓을 자신이 없기도 했다. 사실 그렇게 손주가 살아온 이유가 있음을 아무도 알지 못한다.

3개월 남은 시한부 인생의 할머니가 가실 때까지 북한에서 건너온 손주의 역할을 무대에서 펼쳐지는 연극이 아닌 현실에서 펼쳐지는 연기에 두 연극배우가 도전을 한다. 처음에는 돈에 혹해 동의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연기가 아닐 만큼 거의 완벽한 가족이 되어 얼마 남지 않은 할머니와 가족들의 삶에 위로가 되어 주며 커튼콜 시간을 기다린다.


모든 것들이 들통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그들은 연기를 꼭 성공시키겠다는 다짐과 그에 따른 보상을 기대하며 도전했던 그들이지만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는 시간이 깊어 갈수록 결국 물질보다 마음을 더 움직이게 한다는 것을 깨달아 간다.


선한 거짓말

그 거짓말로 인해 누군가 고통을 받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상황에 오히려 더 좋은 상황들이 만들어지고, 선한 거짓말의 목적에 맞게 전혀 악의가 없는 그들의 거짓된 연기는 정말 손주인 것처럼 가족인 것처럼 가족을 대하는 상황에 이르고, 누군가 이 틀을 깨는 사람이 없다면 할머니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어쩌먼 생이 끝난 후에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 동의할 수 있을까?

거짓말은 어떤 경우라도 좋지 않은 것이지만 그것이 누군가의 욕심이 아닌 선한 의도에서 하게 되는 거짓말이라면 그리고 아무도 고통을 받지 않는다면 그럴 수 있다면 나는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을까?


드라마 속의 내용이 그렇지만 사실 우리는 생활 속에서 수도 없는 선한 거짓말을 하며 살아간다.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 주지 않으려, 근심 걱정하지 않게 하려고 그렇게 살아간다.


누군가의 잘 지내냐는 물음에 우리는 의례 “괜찮아”, “잘 지내”라고 이야기를 한다. 힘 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음에도 우리는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처럼 생활 속에 이미 선한 거짓말은 수용되고 통용되고 있다.


드라마에서 처럼 엄청난 거짓말의 상황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만들 수도,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없겠지만 일상적인 삶 속에서 선한 거짓말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도 힘들 땐 힘들다고, 우울할 때 울고 싶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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