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해를 가득 채우지도 못한 채 낯선 도시로 떠나던 그날 내 앞에 펼쳐질 세상에 대한 기대와 설렘이 가득했다기보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했었을 것이다.
기대, 설렘, 걱정 그런 것들은 내가 느끼는 감정이고 느낌이었겠지만 미지의 세계로 자식을 내 보내는 부모님의 마음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내가 가졌던 걱정만큼 어쩌면 더 큰 걱정을 하고 계셨을까? 아니면 넉넉지 않은 형편에 식솔 하나가 줄어 조금은 마음이 편해지셨을까? 그래도 번듯한 직장에 입사를 했으니 한숨 돌리시기는 했었을 것이다. 만약 내가 일자리도 제대로 얻지 못하고 방황을 했더라면 더 큰 걱정을 하셨을 것이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지 못한 채 아무 말도 한채 속이 문드러져 가셨을 거다.
시간이 지나고 아이들의 부모가 되고 그 아이들이 벌써 다 커서 내가 직장인으로의 첫발을 내딛던 때 보다 더 많은 나이가 되어 버렸다. 지금 이 시점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물가로 아이를 내 보냈던 그 시절과 같은 시점이 되어보니 우리 아이들이 회사로 나아가 구실을 잘할 수 있을까란 생각을 가지게 된다. 나의 부모님도 같은 마음이었을 거다. 몰랐던 부모의 마음을 말해주시지 않았었지만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내가 사회로 첫발을 그때 또 다른 시선이 있다. 어린 동생들. 5살, 10살 두 동생들도 오빠가 형이 어디로 가는지 궁금해했을 것이다. 그 나이로 돌아갈 수 없기 그때의 심정을 생각들을 알 수 없지만 돈 많이 벌어 와서 맛있는 것도 사주고 용돈도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난 그때 동생들이 어떤 표정으로 나를 떠나보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내게 바라던 그런 기대에 한 번도 충족시켜주지 못했었다. 나 혼자 살아가기 바빴고 나만 생각하고 살았던 것 같다. 다행히도 두 아이 모두 잘 자라 주었고 각자의 삶을 잘 살아가고 있지만 내가 그렇게 신경을 쓰지 못했던 동안 부모님들은 너무 많은 고생을 하셨었다.
내가 떠난 33년 전 그날 이후 10년도 되지 않아 아버지가 젊은 나이에 세상과 작별을 해야 했었다.
간암 말기. 아무리 힘들어도 힘들다 꺼내어 말하시지 않고 혼자 감당하시느라 얼마나 힘드셨을까? 병상에서 몇 개월을 지내다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날. 내가 좀 더 신경을 썼었더라면 어땠을까란 후회를 하던 그날은 이제 그 기억들이 희미해져 가지만 왜 아버지가 그렇게 살아가셔야 했었을까를 이제야 그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해 본다. 그 마음을 다 알 수는 없지만.
비록 아버지는 너무 일찍 가족과 이별을 했지만 농사일만큼 자식 농사도 잘 짓고 가셨다. 과묵하신 아버지가 말도, 표현도 잘하지 않으셨어도 내심 뿌듯해하시고 잘 자란 곡식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우리를 바라보지 않았을까? 아쉬운 것 우리가 제대로 영글기 전에 이별을 했어야 한다는 거다. 잘 익은 곡식을 수확하듯 잘 성장한 자식들에게 대접 좀 받으시며 살다 가셨으면 좋았을 텐데.
부모는 자식들에게 부모를 위해 무언가 해 주길 바라지 않는 것 같다는 것을 아이들을 다 키워놓고 보니 알게 된다. 단지 아이들이 자기 앞가림 잘하고 잘 살아갔으면 하는 바람인 것처럼 나의 아버지, 어머니의 그 마음도 그랬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