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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eotany 니오타니 Apr 04. 2022

나의 할머니

휴직을 하고 제주에 온 지 2주가 되어간다. 처음 며칠은 쌀쌀하고 비가 왔다. 낯선 곳에 가 머무를 때면  지도를 보고 위치가 어디쯤인지 확인을 하고 산책을 하며 주변을 탐색한다. 주변에 대한 그림이 어느 정도 머리에 그려져야 안심하는 편이다. 차츰 반경을 넓혀 걸을 수 없는 곳은 차로 둘러보기도 했다. 다니다 보면 할머니들을 만나게 된다. 아직 쌀쌀한 날씨지만 제주도 시골마을의 할머니들은 참 부지런하시다. 약속이 있었던 이른 아침 하도 해변엔 해녀들이 물질을 하고 있었다. 바람이 거센 날이었다. 이보다 찬 겨울 바다에도 거침없이 들어가는 삶을 사신 분들이다. 식료품을 사러 골목길로 들어가면 밭일을 마치고 삼삼오오 걸어가시는 할머니들을 만나기도 한다. 그중 몇 분은 허리가 90도 가까이 굽어있었다. 얼마나 힘든 일들을 많이 해 오셨으면 허리가 저렇게까지 되셨을까. 제주는 엄마와 자주 여행을 다니던 곳인데, 몇 년 전 5월 즈음이었다. 밥을 먹고 걷던 해안도로에서 물질을 마치고 나오시는 할머니들을 만났다. 우리는 평생 일만 하는데 놀러도 다니고 좋겠어요, 그러는 할머니 손을 꼭 붙잡은 엄마의 손이 생각난다.


나는 허리가 굽으신 할머니들을 보면 우리 할머니가 생각난다. 내가 처음 기억하는 할머니는 60대 후반이었을 텐데 그때 이미 허리가 굽어 지팡이를 짚고 다니셨다. 처음 허리를 다쳤을 때 병원에 입원해 제대로 치료를 받았어야 하는데, 한의원에서 침만 맞으셨었다 했다. 그때는 어떻게 치료해야 할지 정보도 많이 없었고 할 일들이 너무 많아 쉴 수가 없다고 하셨다. 평생 할머니가 무언가를 후회하거나 부정적인 말을 하시는 걸 들어본 적이 없는데, 단 하나 허리 치료 시기를 놓친 건 너무 아쉬워하셨다. 봄에서 가을까지 시골에서 과수원 농사를 지으시다 겨울엔 우리 집에서 보내셨다. 중학교 때까지 여름 방학은 늘 시골 할머니 집에서 보냈다. 우리가 오면 주신다고 늘 철보다 이르게 옥수수를 심어놓으셨다. 도착한 날부터 쪄주시던 달큼하고 보드라운 어린 옥수수 알갱이의 맛이 지금도 생생하다. 할머니가 차려주시던 밥상엔 호박잎, 비름나물 그리고 각종 여름 채소와 된장찌개로 풍성했다. 음식 솜씨가 좋으셨는데, 아직도 할머니가 해주시던 나물 맛을 따라올 자는 없는 것 같다.(엄마 미안!) 혼자 책 보고 그림 그리고 가끔은 사촌을 만나 돌아다니다 뜨거운 낮이 되면 시원한 수박이나 얼음을 넣은 미숫가루를 들고, 과수원 어딘가에 계신 할머니를 찾아가면 그렇게 반가워하고 좋아하셨다.     


여든을 넘기면서 더 이상 시골에 가지 않으셨다. 활동적인 할아버지는 아침이면 기원과 종친회로 나가시고 가족 모두가 외출한 뒤 아마 거의 모든 시간을 집에서 혼자 보내셨으리라. 할머니는 하루 종일 볕을 쫓아 방에서 거실로 옮겨 다니시며 화투점을 떼셨다. 그리고 가끔은 나와 함께 민화토를 치시며 시간을 보내셨다. 돋보기를 끼고 책을 보시기도 하고, 엄마가 장을 봐오면 함께 다듬고 음식을 하셨다. 외출하시는 일이 거의 없으셨다. 나는 할머니가 좋았다. 할머니가 나를 바라보는 눈길, 누구에게도 모진 소리 하지 않으시는 그 선량함과 점잖음, 불편함이나 불만을 내색 않으시고 늘 평온함을 유지하는 안정감. 할머니를 안을 때 나는 냄새와, 좋아서 터트리시는 배시시 한 웃음까지 아직도 생생하다. 


어느 토요일이었다. 그날 집엔 나와 할머니 밖에 없었다. 늦잠을 자고 외출하려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시다 오늘은 집에 있으면 안 되겠냐고 하셨다. 그냥 약속이 있다고 해도 됐을 텐데, 할머니 나도 회사일로 스트레스 많아요, 주말이라도 놀면서 풀어야죠, 그러고선 나갔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가끔은 그날이 생각난다. 오전 햇살이 들어오던 그 거실의 풍경과 그 안에 동그마니 앉아계시던 할머니의 모습이. 할 수 있다면 그날로 돌아가 할머니를 모시고 나가 봄날의 꽃을 보여드리고 싶다. 그리고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맛있는 음식을 해드리고 싶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수개월 전부터 점차 기력을 잃어가셨다. 지병은 없으셨다. 매일 퇴근을 하면 거실에서 반갑게 맞아주셨는데, 어느 날부터 방을 나오지 않으셨고-못하셨던 걸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자리에 누워 계시는 날이 지속되었다. 여느 날처럼 퇴근 후에 퇴근 후에 할머니 방으로 들어갔는데, 문득 얼마나 답답하실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거실에 이불을 펴고, 아버지와 할머니를 요째 들고 거실로 나와 가족들이 그 곁에 빙 둘러앉았다. 저녁을 드시고 이빨을 닦지 못하셨을 것 같아, 살짝 머리를 부축해서 이를 닦여 드렸더니 너무 개운하다고, 내 손을 붙잡고 고맙다고 하셨다. 할머니가 내게 해주신 것들이 수천수만 가진데, 기력이 없으신 가운데서도 고작 그 하나로 내게 고맙다고 하실까.... 그리고 며칠 후, 근무시간에 엄마가 전화를 하셨다. 할머니가 병원에 입원하셨는데, 지금 와 보라고. 허겁지겁 반차를 내고 병원으로 갔을 땐 이미 임종하신 뒤였다. 내가 출근하고, 몇 시간 후 호흡이 심상치 않아 앰뷸런스로 병원에 가신 후, 곧바로 임종하셨다 했다. 


그 다음다음 해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 전해부터 대장암 판정을 받으셨으나, 아흔의 고령이셨고 병원 치료를 꾸준히 받으셨기에 병이 진전되는 속도는 매우 느렸다. 하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치료를 거부하셨고, 마지막엔 많이 고통스러워하셨다. 가톨릭병원 호스피스 병동으로 가셨고, 모르핀 주사를 맞으면서 마지막 몇 주를 보내셨다. 고통스러워하는 할아버지의 손을, 신부님이 꼭 붙잡아주시며, 두려워하지 말고 편히 가세요. 제가 함께 하겠습니다... 기도를 해주셨고, 그날 밤 영면에 드셨다. 임종을 기다리며 병실에 있다가, 자정이 넘어 너는 집에 가서 눈 좀 붙이고 오라고 엄마가 등을 떠미셔서 집으로 가다가 임종 소식을 들었었다. 


가끔씩 할머니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떠오르는데, 두 분은 요양원이 아닌 가족들 곁에서 마지막을 보내드려서 그나마 마음에 짐이 조금은 덜어진다. 인간의 생이란 게 영겁의 시간 안에 한 점도 안된다지만, 시간이 벌써 십오륙 년이 흘렀고, 내 손을 꼭 쥐던 할머니의 온기는 여전히 생생하다. 


방학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나를 보이지 않을 때까지 길 위에서 바라보던 할머니가, 그 할머니를 돌아보며 하염없이 손을 흔들던 그 여름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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