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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eotany 니오타니 Apr 04. 2022

인생이 진부해질 때

휴직 일기 

1950년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했지만 곧바로 6.25 전쟁이 터지면서 학교를 중퇴하고 어린 조카들, 넋 나간 노모를 부양해야 하는 소녀가장의 처지가 되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피란 가서 비어있는 이웃집을 털어 몇 줌의 곡식이나 묵은 김치 따위를 구해오는 일이었지요. 그런데 서울대 학생이란 소개 덕에 미군 PX에 취직할 수 있었고 가족들을 배불리 먹여 살릴 수 있었어요. 그러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게 짐승스러운 짓만 같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자기모멸이 그 시대를 증언하고 동족상잔에 대한 혐오와 이념에 대한 허망함에 대해 말함으로써 사람 노릇을 하고 싶다는 참을 수 없는 욕구가 되어 많은 작품을 쓰게 했지요.

서울대에 입학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렇게 알뜰하게 서울대 덕을 보았는데 무엇을 더 바라겠어요. 오늘 주시는 이 학위는 자기를 돋보이게 하는 속물스러운 일 따위에 절대로 써먹을 생각이 없기에 받을 용기도 낼 수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뒤통수만 보고 흠모하던 이가 뒤돌아보며 따뜻한 눈길을 보내준 짜릿한 기억처럼 저 혼자만의 밀실에 두고 삶이 진부하고 지루해질 때마다 꺼내 보고 위안을 삼겠습니다.  


- 박완서, 서울대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으며


내 삶이 진부하고 지루하다 느껴질 때, 나는 꺼내볼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버리고 감사하기 위해 글을 쓰고 싶은 것일까.  이럴 때 떠오르는 것이 까미노 데 산티아고 길을 걸었던 추억이다.  10년 전 회시를 그만두고 스페인 까미노 순레 길에 올랐다. 그 길에서 많은 친구를 만났다. 소냐도 그중 한 명이다.


뮌헨에서 온 소냐는 늘 걱정이 많았다. 걱정도 많았지만 짐도 많아 언뜻 봐도 엄청나게 큰 가방을 짊어지고 있었다. 하루 최소 10km 이상 보통 20km를 걷는 길에서 적정 가방의 무게는 10kg 내외이다. 소냐의 가방은 최소 15kg은 넘어 보였다. 여러 날을 함께 걸으며 동행이 된 사람들이 가방 안에 무엇을 그렇게 많이 넣었는지 궁금해했다. 소냐가 열어 보여준 가방의 절반은 음식으로 채워져 있었다. 스페인 북부의 시골길을 걷는 길이어서, 걷다 보면 요기를 할 식당이 없거나 상점이 닫는 시간에 도착하는 경우가 많아(그렇다, 스페인에는 시에스타가 있다!) 당일 한 끼 음식은 준비해서 떠나곤 한다. 쏘냐의 가방에 들어있는 음식으로 사나흘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 날 길 동행인 캐나다인 라파엘이 소냐의 가방을 들다가 휘청거리며, 남자인 자기가 들어도 이렇게 무거운데 가방 무게를 줄이는 게 어떠냐고 조언을 했다. 소냐는 가방에서 뺄 것을 찾아보았지만 어떤 것도 버릴 수가 없었다고 했다. 오늘 길을 가다가 맛있는 오렌지가 먹고 싶은데, 오렌지를 파는 곳이 없으면 어떡하지. 지금 이 도시에 이렇게 맛있는 빵이 있는데, 내가 먹고 싶은 순간에 빵 가게가 나타나지 않으면 어떡하지.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으로 소냐의 가방은 늘 한이었다. 모두의 염려만 보태어질뿐 가방의 무게를 덜어내진 못했다. 다행히 그녀는 자신의 짐을 끝까지 운반했다. 꼭 필요한 것만 지녀야 하는 유목민의 삶에, 길이 끝날 때까지 소냐는 끝내 정착민의 삶의 습관을 내려놓지 못했다. 그리고 그만큼의 걱정과 고민도 늘 함께 지고 다녔다.


순례길의 종착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한 날 소냐와 한방을 썼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내 옆에서 자던 소냐가 동그마니 침대에 웅크리고 있다. 잘 잤냐는 인사를 건네자마자 소냐의 눈에선 눈물이 흘러내린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가방을 싸고 길을 떠나는 생활이 이제 끝났다고 생각하니, 이제 뭘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생각할 필요도 없고, 오늘 내가 견뎌야 할 보이지 않는 삶의 무게에서의 해방이 이제 마지막이라니… 다시 북적이는 일상으로 돌아가 잘 적응할 수 있을까? 그 일을 계속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남자 친구는 있지만 그 사람이랑 결혼하게 될지도 모르겠고, 여전히 내 삶은 모호하기만 한데. 너무 두렵고, 무서워….


소냐의 흐느낌이 어떤 것인지 나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나도 똑같은 심정이었으니까. 어느 한 길이 하나의 여정의 마침이 인생의 답을 짠하고 내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남아있는 막연함과 모호함이 두렵기도 했다. 내가 소냐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았다. 그냥 손을 잡아주고 어깨를 두드려주며, 나도 너와 같은 두려움이 있다고, 네가 무거운 가방을 지고 끝까지 길을 걸은 것처럼 네 인생의 길도 잘 걸어갈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그 가운데 몇 가지쯤 덜어낸다고 해서 삶이 크게 위험해지거나 불편해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자신에게 이야기하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나도 잘 잊어먹고 마음에 새기지 못하면서 남에게 해주는 위로가 얼마나 덧없고 공허하게 들렸을까 싶다. 다행히도 소냐는 내 이야기에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에게 들려준 말을 지금의 나에게 다시 해주고 싶다. 모든 걸 손에 들고 복잡하게 계산하지 말라고. 결정적 순간에 들리는 마음의 소리에 좀 더 집중해 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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