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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eotany 니오타니 Apr 04. 2022

햇살의 향기 같은 추억

휴직 일기

까미노의 여정은 매일이 다른 길이었다. 어느 길은 수월하지만 지루했고, 또 어떤 날은 힘들지만 천국 같은 풍경을 선사하기도 했다. 평균 25km 정도의 길을 매일 걸었고, 새벽에 출발해 정오가 지나 숙소에 도착하곤 했었다. 풍경이 좋으면 중간에 쉬어가며 늦게 도착하기도 하고 지루하고 힘든 날이면 빨리 도착해 쉬고 싶은 마음에 빨간 구두를 신고 춤추는 소녀처럼 그렇게 쉬지 않고 걷기도 했다.


길을 건 지 2주가 조금 지난 어느 날, 알베르게(숙소)에 도착하니 오랜만에 볕도 좋고 따뜻해서 밀린 빨래를 해볼까 싶었다. 등산복과 양말 등등은 매일 빨아 입었지만 바람막이와 후드 점퍼, 알베르게에 도착해서 입는 운동복 등등은 출발 이후 한 번도 빨지 못했었다. 한 아름 옷을 안고 마당 한켠에 있는 빨래터로 나갔다. 막상 가지고 나오긴 했는데, 이 모든 걸 손빨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살짝 한숨이 새어 나온다.

그때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너도 오늘 나처럼 할 일이 많은 것 같구나.


돌아보니 역시 한아름 빨래를 안고 조지가 활짝 웃고 있었다. 조지는 아내 얼린다와 까미노를 걷고 있는 캐나다인이다. 조지와 얼린다를 처음 만난 것은 전날 까르리온 Carrion 이라는 도시에서였다. 부엌에서 그를 처음 봤을 때 얼린다와 함께 요리를 하던 그는 우리에게 자신의 요리비법 몇 가지를 전수해 주었었다. 내가 마음의 진통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알렝과 함께 노래로 위로를 해 주기도 했다. 어떤 이는 얼굴에서 그의 살아온 나날과 마음이 드러나기도 한다. 조지의 맑고도 환한 표정과 미소를 보노라면 가식 없이 열려있는 그 따뜻한 마음이 고스란히 내게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


 빨래 비누가 없어 늘 샴푸를 들이부어 빨래를 하던 내게 자신의 비누를 건네주며, 조지는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자녀가 없던 그는 조카들을 키웠었는데, 이제 아이들이 다 자라 학교로 떠나버렸다며, 약간은 쓸쓸한 그들의 삶에 까미노는 새로운 친구를 만날 수 있는 좋은 여행길이라며 매년 봄마다 벌써 7번째 이 길을 걷고 있다고 했다. 나는 아마 시간이 지나면 그 조카들이 아이를 안고 다시 돌아올 거라고 했더니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바탕 크게 웃었다. 시골집에서 지하수를 올려 쓸 때처럼, 이곳에서 물을 쓰기 위해선 벽에 두꺼비 집처럼 붙어있는 수도 레버를 올렸다 내렸다 해야 했다. 우리는 교대로 벽을 오가며 서로 도와 빨래를 마쳤다.


말끔히 헹구어진 옷을 빨랫줄에 탈탈 털어 널면서, 조지는 태양에는 특별한 향기가 있다고 했다. 건조기에 말린 빨래에서는 결코 맡을 수 없는 그 달콤한 먼지 같은 향기가 볕에 쪼여진 빨래에서는 폴폴 풍겨난다고. 정말이지 건조한 바람과 그 무어라도 다 태울 듯한 강렬했던 태양 볕에 바싹 마른 그날의 빨래에선 더욱더 특별하고 햇살의 내음이 묻어있었던 것 같다.


조지의 아내 얼린다는 필리핀 출신 캐나다인이었다. 요리는 함께하고 빨래는 조지가, 그리고 빨래를 마친 조지의 손에 로션을 발라주는 것은 얼린다의 역할이었다. 특별히 유난을 떨지 않아도 오래 시간 함께한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조지의 손톱을 깎아주는 얼린다의 손끝에서 볼 수 있었다. 


레온에 다다르기 전 그들은 내게 작별 인사를 고했다. 레온에 머무르지 않고 한 마을을 더 갈 거라며, 나는 이 길이 처음이니 아름다운 도시를 하루 정도 더 머물며 즐기는 것도 좋을 것이라 했다. 못내 서운해하는 내게 조지는 말했다.


네가 하루를 더 머문다면 너는 같이 걷던 정든 친구와 헤어져야 할 거야.

하지만 또 뒤에 오는 새로운 친구를 만나게 될 수도 있지.


그들과 헤어지고 한참이 지난 후 나는 조지의 그 말이 떠올랐다. 그래, 내 앞엔 이미 모든 것이 주어져 있고, 나는 선택을 할 뿐이구나. 삶이란 건 없는 그 무언가를 갈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야 할 길을 선택하는 과정이구나.


한 번은 그들을 더 만나고 싶었다. 그리고 기적처럼, 산티아고에 도착한 바로 그날 대성당에서 그들을 다시 만났다. 이미 피니스테레까지 다녀온 그들은 그날 저녁 비행기로 캐나다로 돌아갈 것이라 했다. 조지도 함께 빨래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던 그 순간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주 짧고 사소한 한 순간이었지만 그날을 생각하면 그날 같은 환하고 강렬한 햇살이 맘속에 비쳐 드는 것만 같다. 그날 빨래에서 풍겨오던 태양의 향기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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