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직 일기
남편 빌과 함께 여행하는 재클린은 늘 쾌활했다. 수다를 좋아하고 드라마를 좋아하고 노래를 잘하는 재클린, 정도 많고 웃음도 많은 재클린은 어떨 때 보면 전형적인 한국 엄마 같기도 했다. 남편 험담도 곧잘 했는데,
빌(그녀의 남편)은 당나귀 같아서, 좀처럼 앞으로 안 나가려고 해. 그래서 코 앞에서 이 빵을 하나씩 흔들면서 아방, 아방(앞으로, 앞으로!) 채찍질을 해야 겨우 한 발자국씩 움직인다고.
재클린의 말을 들으며 둥그렇게 큰 눈의 빌을 떠올리니 당나귀란 비유가 절묘해서 나도 모르게 깔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재클린이 살짝 웃으며, 요런 쯧쯧쯧 하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어느 날은 도착한 숙소에선 남편 빌과 굳이 다른 방에서 자겠다며, 우리가 있는 방으로 남편을 밀어 넣기도 했다. 까미노의 숙소는 대게 열 명이 넘게 같이 자곤 했는데 그날은 오랜만에 오랜만에 8명만 자는 단출한 방이었다. 오늘은 깊은 잠을 잘 수 있겠구나, 하는 기대는 잠자리에 들자마자 접어야 했다. 재클린의 남편 빌이 내 건너편 침대에 있었는데, 밤 새 대단한 콧소리 운동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함께 걷던 레이첼이 잘 잤냐고 아침 인사를 하길래, 알면서! 하고 웃었더니, 이제야 왜 재클린이 빌을 따로 이 방에 넣었는지를 알겠다고 해서 다들 한바탕 웃은 적도 있다.
까미노를 세 번째 걷는 쾌활한 성격의 재클린은 정보도 많고 늘 화제도 풍성했다. 저기 보이는 저 나무로 만든 작은 집이 뭔 지아니? 오레오야, 오레오. 옥수수를 보관할 때 사용하는 창고지. 이 꽃들은 또 얼마나 예쁜지~ 쉼 없이 얘기하는 재클린을 보고 빙그레 웃는 나를 보며 그녀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까미노에 오기 몇 년 전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기 위해 어떤 단체에서 주관하는 reflection에 참가를 했단다. 그때 한 부자 여인과 룸메이트가 되었어. 그런데 내가 처음에 방에 딱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이 물건은 내 거고 저 콘솔은 내가 쓸 거고, 이 건 만지지 말고… 너무나 거만하게 명령조로 얘기를 하는 거야. 기분이 확 상했지. 그동안 얼마나 입겠다고 가져온 모피코트로 옷장을 꽉 채웠더구나. 그런데 그렇게 도도하던 사람이 식탁 모서리에 살짝 부딪히는 일이 있었는데, 그만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기 시작하더구나. 크게 다친 것도 아닌데 말이야. 알고 보니 그 여자가 처음 아기를 가졌을 때 모서리에 부딪혀 넘어지면서 아기를 잃었다더라. 그리고선 차례로 5번의 유산을 경험하고 끝내 아이를 가질 수가 없었지.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전에는 천박한 취미로 보였던 그녀의 모피코트가 말이야, 그래 그 깟 모피코트쯤 열 벌이고 백벌이고 당신은 가질 자격이 있다... 이런 생각이 들더라. 우린 여기서도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잖니? 때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도 만나게 되는데, 그런데 말이야 우리 누구도 다른 사람, 타인의 행동을 함부로 판단하고 비판할 수는 없겠단 생각이 들더라. 그 여인을 만난 이후론 말이야. 그 사람 마음에 어떤 상처와 어떤 생채기가 있는지 결코 알 수 없을 테니까 말이야.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하는 비에, 재클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작고 큰 상처를 받게 된다. 우리 모두가 나약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각자의 고통이 이해가 되고 또 타인에 대해 얼마만큼은 너그러워질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왜 나만 고통스러운가 가 아니라, 고통스러우니까 인간이라는 진리. 그래서 사람은 늘 위로와 이해를 갈구하고 나누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기 전엔 그 사람의 고통을 알 수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