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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eotany 니오타니 Apr 05. 2022

너무 늦은 때는 없다

휴직 일기

요아킴은 덴마크에서 온 금발이 멋진 청년이었다. 카미노 순례길에 오기 전 브라질 밀림에서 세 달을 여행했다고 했다. 다큐멘터리를 보면 아마존에서 야생동물도 먹고 벌레 때문에 엄청나게 고생하고 위험한 일도 많이 겪던데, 어떻게 세 달을 지냈는지 궁금했다. 요아킴은 웃으면서 그런 곳도 있지만, 그렇게 깊숙이 들어가지 않고 현대의 문명이 스며든 곳도 많다며 과일과 빵을 먹으며 지냈다고 했다. 아마존, 이름만으로도 신비로운 곳. 어떤 은하계보다도 멀게 느껴지는 그곳을 다녀와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하는 요아킴이 근사해 보였다.


함께 걷던 어느 날, 길이 너무 아름다워 저절로 노래가 흥얼거려졌다. 요아킴이 먼저 노래를 불렀다. 스페인 가요라는데 멜로디가 감미롭다. 나는 이루마의 <널 그리다>로 답가를 했다.


언젠가 파란 하늘 사이로

너에게 보낸 나의 마음을

천천히 나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속에

가만히 두 눈을 감고 나만의 널 그리다

맑은 너의 그 미소는 따뜻한 여름 비처럼

너와 지금 이 순간도 함께 나누고 있어


요아킴은 배낭에 피리를 꽂고 다녔는데 일행 중 한 명이 연주를 청하면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아마도 아마존에서 배워온 듯 가락이 구슬프면서도 아름다웠다. 그의 연주는 훌륭했다. 서로의 문화에 대해 질문도 했다. 


덴마크 하면 뭐가 떠오르니?

글쎄.. 덴마크? 한국에선 아마 우유와 요구르트가 가장 유명할걸. 낙농국가 이미지가 강해서.


요아킴이 상당히 미묘한 표정을 짓는다.


그래? 그거 참 재미있군. 안데르센은 한국에선 유명하지 않아? 중국인과 일본인들은 잘 알고 있는 것 같던데.

아, 맞다! 안데르센. 유명하지. 나도 어렸을 때 안데르센 동화책 얼마나 재미있게 봤다고. 인어공주 읽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그런데 너는 한국을 생각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올라?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십 년 전의 한국은 지금과는 또 위상과 관심이 다른 지역이었다. 


김치나 불고기 정도는 알고 있어. 너희는 어떤 언어를 쓰니?

우린 한국어를 쓰지. 우리만의 알파벳, 한글도 있는걸. 세종대왕이라고 하는 분이 만들었단다.

코리안 알파벳은 몇 개야?

음.. 그게 좀 복잡한데 모음이 기본 자음과 모음이 28개가 있고 거기서 변형이 많이 생기지. (사실 이 부분에서 좀 막혔다. 한글 개수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입시 공부의 폐해인가)

그럼 그 걸로 모든 언어를 다 표기할 수가 있단 말이야? 대단한걸.

그럼. 세종대왕이라는 조선시대의 왕이 만들었는데 소리를 내는 구강구조와 입 모양을 연구해 만든 과학적인 표기법이라고.


까미노를 걸을 때 한글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았다. 개수와 원리에 대한 질문이 많았는데, 부끄럽게도 당시 왜 그리 기본 한글 자모음의 개수가 헷갈리던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가다 보니 한 무리의 소떼가 나타났다.


요기, 너 아니? 같은 초식동물이라도 염소나 사슴하고 소의 다른 점이 뭔 줄 알아?

글쎄. 먹는 양 정도?

아니야. 다른 초식동물들은 늘 풀을 뜯어먹느라 정신없이 바쁜데, 소들은 가끔 되새김질도 멈추고 먼 곳을 응시하며 명상을 하는 듯해 보이기도 해. 생각을 하는 것 같아.


하얀 소들이 자기 얘기를 한다는 걸 아는 듯,  ‘뭐가 이리 시끄럽게 재잘대는 거야?’라는 듯 우리를 한 번 쳐다보더니 슬슬 풀밭에서 움직이길 시작했다.


소소한 얘기와 음악들로 요아킴과 걷는 길은 항상 즐거웠다. 요아킴이 할아버지 세례명과 같다고 했더니 그럼 내가 자기의 할아버지라며 만날 때마다 인사를 하라고 시키기도 했다. 산티아고 대성당에 함께 도착한 다음날 정오미사에 요아킴은 이 한낮에 피니스테레로 출발하겠다고 가방을 짊어지고 있었다.


출발하기엔 너무 늦은 시각 아니니?


이렇게 묻는 내게 요아킴은 갈 수 있을 만큼만 걸어가다 쉬면 된다고 피니스테레에서 만나자며 손을 흔들었다. 피니스테레에 도착한 저녁, 노을을 바라보는 요아킴을 멀리서 봤었다. 그날은 왠지 혼자이고 싶어 인사하지 않았는데, 그만 그것이 요아킴과의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여행이 끝난 후 요아킴에게서 온 메일에는 그날의 이야기가 적혀있었다.


마지막 우리가 대화를 나눈 날, 넌 출발하기엔 너무 늦은 시각이라 이야기했었지?

길을 걸으면서 내내 너의 말을 생각했다. 그리고 이 말을 네게 해주고 싶었어.

시작하기에 너무 늦은 건 세상에 없다고. 그러니 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그 열정을 쫓아가는 것이 가장 행복한 인생을 사는 것이라고.


가끔 너는 어떤 인생을 시작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요아킴.

그리고 잊고 있던 너의 말이 오늘 내게 큰 힘을 준다는 걸 네가 알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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