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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욘 Jul 28. 2020

믿어주는 한 사람이 있다면.

"김수연 님은 사람을 잘 못 믿으시는 것 같아요."


심리 상담 중에 상담 선생님이 말했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다른 사람에게 확인받으니 새삼스럽다. 잘 못 믿는 정도가 아니라 믿어보려 한 적도 없다는 이야기는 굳이 하진 않았다.


감정이 없는 사이코패스나 반사회적인 소시오패스는 아니다. 보기보다 감성적이기도 하고, 상대방의 기쁨이나 슬픔에 마치 내가 겪은 일 마냥 공감하기도 한다. 제대로 된 믿음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믿음의 메커니즘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모른다고 하는 게 맞겠다.


나는 꽤나 예민한 탓에 상대방이 말하지 않아도 나에게 어떤 기대를 하는지 금세 파악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그 기대에 부응하려 아등바등한다.


초등학교 때 방과 후 활동으로 클래식 기타를 배웠다. 기타 선생님은 나를 아주 좋아했는데, 내가 초등학생 답지 않게 참해서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낯을 가리고, 어른이랑 이야기하는 게 불편해서 말을 안 하고 있었던 것뿐인데. 조용한 내가 좋다던 그 선생님 앞에선 더욱 말을 아끼게 됐다.


하루는 같이 기타를 배우는 친구와 깔깔거리며 요란을 떨고 있었는데, 때마침 기타 선생님이 음악실로 들어왔다. 선생님은 브루투스에게 배신당한 카이사르 같은 표정으로 "방금 소리 지른 거 수연이니?"라고 물었다. '내가 아는 수연이가 그럴 리 없어.'라는 선생님의 마음의 소리가 들렸다. 차분하고 조용한 학생이라 믿었는데, 여느 초등학생과 다르지 않아서 실망하신 것일까. 그 날 이후로 선생님은 나를 예전만큼 좋아하지 않았다.


회사를 그만둘 때, 인사담당자도 비슷한 말을 했다. 제일 먼저 그만둔다고 할 줄 몰랐다면서. 오래오래 버티면서 잘 다닐 거라 믿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자기가 사람을 잘 못 봤다고 비난했다.


내가 그 사람들에게 김수연은 조용하고 참하고 고분고분하게 말도 잘 듣는 아이고, 아무리 힘들어도 차분하게 참고 버틸 수 있는 사람이라고 기대하라 한적은 없다. 판단은 본인들이 멋대로 했으면서 왜 비난은 내가 받아야 하는지 의문이 들면서도, 그들이 기대하는 나의 이미지를 아주 성실하게 만들어 보여주며 그 제멋대로인 믿음에 힘을 실어줬었다.


나에게 믿음은 폭력이다. 그것도 아주 일방적인. "나는 널 믿어."라는 말은 "내가 생각하는 대로, 원하는 대로 네가 행동해 주기를 바라고 네가 그 기대를 저버리면 크게 실망할 거야."라는 말이다. 네 속이 꽈배기처럼 배배 꼬여서 꼬아 듣는 것 아니냐고 묻는다면, 반박은 못하겠다.




커피프린스 1호점


여름이면 정주행 해야 하는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에서 최한결은 고은찬에게 이렇게 말한다.


"고은찬, 있잖아. 나는 나 믿어주는 사람이 필요해. 개망나니라고 해도, 천하의 쓸데없는 놈이라고 모두가 욕해도, '최한결은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최한결은 한다면 하는 놈이다.', '최한결은 아직 하고 싶은 일을 못 만났을 뿐이다.', '정말 한다면 하는 놈이다.', 그렇게 나 믿어주는 사람. 너처럼 사랑하는 순간에도 속이고, 버려질까 아닐까 재고 따지고 그런 사람이 아니라."


일 년에 한 번씩 적어도 열 번은 본 드라마지만 볼 때마다 새롭게 다가온다. 그렇구나. 최한결의 믿음은 사랑이었구나. 아무리 실패해도, 넘어져도, 찌질해 보여도, 그의 이름처럼 한결같이 응원해주고 지지해주는 조건 없는 사랑.


최한결은 언제나 솔직했다.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걱정하지 않았다. 사촌 형이 사랑하는 한유주를 사랑할 때도, 남자인 줄 알았던 고은찬에게 외계인이어도 상관없다고 고백할 때도 그랬다. 여자임을 알고 배신감을 느꼈어도, 여전히 사랑하는 쥐방울을 다시 한번 믿는다. 솔직한 자신의 감정을, 자신의 선택을, 자신을 믿는다.


사람을 믿지 않는 나는 당연하게 나 자신도 믿지 않는다. 남들에게 처럼, 나 스스로에게도 솔직한 적이 없다. 나에게 잘할 거라, 잘될 거라 응원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엔 어차피 나는 안될 거라는 자조가 가득하다. 뒤처졌고, 실패했고, 말로만 거창하게 떠벌리고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라고 힐난한다.


나도 최한결이 그랬던 것처럼, 믿어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나였으면 좋겠다. '김수연은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김수연은 한다면 하는 놈이다.', '김수연은 아직 하고 싶은 일을 못 만났을 뿐이다.', '정말 한다면 하는 놈이다.'라고 믿어주는 내가 있으면 좋겠다.


얼마든지 실패하고 넘어져도 된다고, 내가 나를 믿어주고 지지해주며 조건 없이 사랑해줄 때 비로소 나로서 존재하고 나답게 살 수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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