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별화와 분리를 통한 존재의 완성
사람의 육체가 단단한 땅을 디디고 있을 때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듯, 사람의 정체성 역시 굳건한 지지대가 필요하며, 출생 당시 어린아이에게는 10달 동안 자궁 속에서 자신을 길러준 엄마와의 신뢰 관계가 정체성의 기반이 됩니다.
어린이가 울 때, 왜 혼자 밥 못 먹느냐며 꾸중하는 엄마는 없습니다. 외로워서 울면 엄마가 달래주고, 배고파서 울면 엄마가 먹여주고, 몸이 더러워져서 울면 엄마가 씻겨주지요. 있는 그대로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는, 엄마라는 타인과의 완전한 융합이 주는 안정감 속에서 아이의 감각이 자극될 때, 비로소 지성과 이성 그리고 감성이 골고루 발달하게 됩니다. 시간이 흘러 아이가 본격적으로 보고, 듣고, 맛보는 경험을 주도할 수 있는 발달 단계에 이르면, 더 이상 타인과 융합함으로 안정감을 성취할 수 없다는 개별화와 분리를 경험하면서 내가 원하면 엄마가 날 위해 움직인다는 유아적 전능감을 벗어 던지고 타자를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나와 다른 사람의 구분이 생기며 아이에게는 스스로 한다라는 마음, 독립심의 씨앗이 발아하며, 존재 자체로 안정감을 누리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렇게 된다면 정말 좋겠지만 세상은 언제나 이상적으로 흘러가지 않기에, 현실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개별화와 분리를 성공적으로 경험하지 못하고, 그들은 엄마와의 분리에서 오는 결핍을 독립된 주체가 아닌 물질적 소유나 즉각적 만족으로 메꾸려합니다. 육신의 성장으로 엄마로부터 독립했지만 여전히 내면은 엄마와 융합되어 있기에, 스스로 존재를 형성하지 못한 채 외부로부터 오는 자극으로의 도피를 통해 안정감을 누리려는 시도는 보통 중독으로 표출됩니다. 핸드폰이나 게임 중독이 그 현상의 대표적 예이며, 이번에 다룰 동화의 주인공 견우와 직녀 역시 개별화와 분리를 마주하지 못한 채 연애감정으로 도피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후덥지근한 여름이 되면 봄철만해도 지면에서 반짝이던 별들이 하늘 꼭대기로 자리를 옮기면서 서로가 더 가까워지는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킵니다. 남쪽에서 무더운 바닷바람이 불어와 비의 계절이 찾아올 무렵 찬란하게 쏟아지는 은하수를 사이에 둔 채 밝게 빛나는 두 별, 견우성과 직녀성을 두고 사람들은 모두가 알고 있는 일년에 한 번 밖에 만날 수 없는 부부의 슬픈 사랑이야기를 지어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대개 그 사이를 떨어뜨려놓은 옥황상제의 처사가 지나침을 안타까워하며, 굳이 왜 그렇게까지 했어야 했는지 의문을 품기 마련이지만, 앞서 언급한 개별화와 분리를 통해 견우와 직녀의 관계를 자세히 살펴보면 옥황상제의 선택에 분명한 이유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견우(牽牛)라는 이름은 말 그대로 소를 이끄는 사람임을, 직녀(織女)라는 이름은 길쌈하는 사람임을 보여줍니다.
이야기 속에서 견우와 직녀가 각자의 직업으로 명명된 것은, 그들이 노동을 통해 자신의 존재성, 정체성을 확립하는 삶을 실현해내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현대철학의 씨앗을 뿌렸다고 평가 받는 독일의 철학자 헤겔의 인간이 노동을 통해 존재를 인정받음으로 진정한 자유, 자아실현을 누릴 수 있다는 주장은, 인간 개인이 스스로의 가치관에 따라 의미 있는 행위를 실천하고, 그가 속한 공동체에게 인정받으며 감탄의 대상이 되는 것이 존재의 완성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임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견우와 직녀는 결혼이라는 관계를 맺게 되자 그들의 존재를 완성시켜줄 노동을 저버립니다. 수고로움을 동반하는 노동과 달리, 연애감정은 손쉽게 안정감을 만족시켜주기 때문입니다. 성장하는 즐거움을 모르는 학생이 공부로부터 도피하듯이 헌신과 희생을 통해 자신이 완성되는 즐거움을 모르는 사람은 수고로움을 감수해야 얻을 수 있는 참된 기쁨을 외면한 채 즉각적인 만족을 추구합니다. 견우와 직녀는 수고로움 없이 상대에게 기쁨을 얻을 수 있는 연애감정이 너무 좋았고 그래서 노동을 통해 스스로 존재를 형성할 수 있는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독립이 아닌 융합으로 안정감을 취하려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인생이라는 문제 앞에서 도피를 선택하며 성장이 아닌 퇴행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제, 첫 번째 질문을 “옥황상제가 왜 그랬을까?”가 아닌 “견우와 직녀가 왜 그랬을까?”로 바꿔보겠습니다. 견우와 직녀는 각자의 영역에서 훌륭히 맡은 바를 감당해내던 사람들이었지만, 수고로움 없이 누릴 수 있는 안정감이라는 유혹 앞에서 독립된 자아를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완전히 하나가 된 것 같아 너무 행복한 시간이라고 그들 스스로도 생각했겠지만, 마침내 상대를 향한 에너지가 소진된다면 즉각적 만족을 주던 연애감정 역시 완전한 안정감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견우와 직녀는 결혼을 통해 인생의 행복을 찾았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은 더 큰 상처와 좌절의 길로 들어선 아주 위험한 상태였습니다. 옥황상제는 그것을 눈치챘습니다. 퇴행은 존재의 가치를 불투명하게 만들며 즉각적 만족은 유한함과 허무함이라는 치명적 한계를 수반합니다. 더 헌신하고 희생하라는 결혼이 오히려 수고로움으로부터의 도피처가 되어버렸기에, 옥황상제는 견우와 직녀를 떨어뜨려놓았습니다.
이야기 속에서 견우와 직녀에게는 그들의 삶을 인도하는 옥황상제가 있었지만, 현실에서 많은 사람들은 옥황상제와 같은 선한 인도자를 만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들은 결혼생활에서 아픔을 겪고 자녀, 동료, 친구 등 여러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습니다. 모든 사람은 반드시 공동체를 필요로 하며 그 안에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모든 것을 보듬어주는 가정이 있고, 같이 성장할 수 있는 학교가 있고, 함께 삶의 터전을 가꾸는 회사가 있다는 것은 놀랍도록 신비한 축복이지만 개별화와 분리를 통해 독립적 개인으로 완성되지 못한 사람에게는 축복이 될 수 있는 모든 관계가 결국에는 버거움과 어려움으로 변질될 것입니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의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문장처럼 말입니다.
노동을 통해 훌륭함을 인정받던 견우와 직녀가 연애감정의 유혹 앞에서 무너져버리고만 이야기는 사실 견우와 직녀의 노동을 향한 동인(動因)이 자신의 존재를 완성하고 자아를 실현하고자하는 독립심이 아닌, 훌륭히 노동을 해내지 못한다면 안정감을 주는 공동체에서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기초로 하고 있었음을 드러냅니다. 그런 사람들은 당장은 헌신하고 희생할 수 있을지라도 반드시 소진되고 맙니다. 기쁨이 아닌 두려움이 삶을 움직이는 힘이 되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노동은 어느 정도 만족과 안정감을 주었지만 결국 소진과 소모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만족과 안정감의 대상이, 게다가 노동만큼 힘들이지 않아도 되는 대상이 나타나자 온 정신을 쏟아 붓습니다. 하지만 안정감을 추구하는 대상만 달라졌을 뿐, 동기부여가 가능한 독립적 개체가 아닌 두려움에 의해 움직이는 의존적 개체라는 자신의 본질이 변하지 않았기에 종착역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견우와 직녀 이야기는 한 개인이 그의 인생에서 결코 개별화와 분리를 피하거나 무시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두려움 때문에 엄마 품을 떠난 경험이 전무한 아이가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나아진다고 느껴진다면, 그것은 사실 엄마를 대체할 수 있는 다른 존재를 찾은 것에 불과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진정한 개별화와 분리는 안정적인 자리에서 발을 떼어야 하기 때문에 분명 충격과 고통을 동반하지만 동시에 독립적 개체로서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존재로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입니다. 미뤄두었던 개별화와 분리의 관문으로 돌아간 견우와 직녀는 일년에 단 하루만 만날 수 있는 현실을 마주합니다. 어린 시절 부딪혔다면 작은 고통으로 넘어설 수 있었던 개별화와 분리가 어른이 되어 만나자 찢어지는 아픔과 슬픔을 수반해야 성취할 수 있는 커다란 벽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인생에 반드시 넘어서야 하는 문제는 피하면 피할수록 감당하기 힘들어지는 특징이 있음을 배웁니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은하수의 검은 부분을 보며 까마귀와 까치의 도움을 받는 견우와 직녀를 상상했습니다. 독립성을 갖기까지 견뎌내야 하는 어렵고 힘든 시간을 사람은 결코 홀로 감당할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사람은 완벽하지 않기에 유아시기 자녀에게 완전한 안정감을 공급해줄 수 있는 부모는 없습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이 견우와 직녀처럼 외부의 존재에 의존해 결핍을 채우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지만 개별화와 분리를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용기를 불어넣어주며 긴 인생 속에서 내면의 결핍을 솔직하게 나누고 채워가는 가족공동체는, 독립성을 향한 길고 고달픈 여정 속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까치와 까마귀 같은 조력자가 되어 줄 것입니다.
개별화와 분리라는 아픔을 겪어야 비로소 참된 사랑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생각을 발견할 수 있는 문학작품을 하나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한글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했다고 평가받는 시인 서정주의 견우의 노래입니다.
시는 ‘우리들의 사랑을 위하여서는 / 이별이, 이별이 있어야하네.’로 시작하여 ‘검은 암소를 나는 먹이고, / 직녀여, 그대는 비단을 짜세.’로 마칩니다.
사랑하는 직녀를 만나는 칠월 칠석을 기다리며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묵묵히 감당하는 견우의 노래는 이별을 통해 비로소 아름다운 사랑을 누릴 수 있음을 깨달은 그의 모습을 감동적으로 비춰줍니다. 엄마와 헤어지기 어려워하는 아이에게 견우와 직녀 이야기를 들려주며 멋진 모습으로 엄마 품에 돌아올 것을 믿는다는 용기를 불어넣어 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견우와 직녀 이야기를 통해 어린이들이 엄마 곁에 있어도 외로움을 느끼는 의존적 존재에서, 엄마와 평등한 독립적 존재로 성장할 수 있는 힘을 발견하길 기대합니다.